[상봉연기 허탈한 이산가족]"손꼽으시던 9순 어머님께…"

  • 입력 2001년 10월 12일 19시 28분


“하루하루가 50년보다도 길게 느껴졌는데…이게 웬 날벼락인가요.”

16일부터 18일까지로 예정됐던 제4차 이산가족 상봉이 북한측의 일방적 통보로 연기됐다는 소식이 전해진 12일 그동안 상봉일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남측 가족들은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1950년 9·28 서울 수복 직후 인민군을 따라 월북해 영영 소식이 끊겨버린 장녀 이신호씨(당시 중2년 재학중)와 상봉 예정이던 어병순(魚炳純·92·전북 남원시 아영면) 할머니는 “상봉이 연기됐다”는 가족들의 말에 미리 챙겨둔 딸의 선물을 쓰다듬으며 눈물지었다.

둘째딸 부자씨(61)는 “90세가 넘는 어머니에게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이번 기회가 꼭 실현되길 바란다”며 상봉에 대한 기대를 끝내 저버리지 못했다.

6·25전쟁 발발 당시 여섯살이었던 셋째아들 이병립씨(60)를 함경남도의 친척집에 혼자 맡겨둔 채 헤어져 54년을 기다려온 권지은 할머니(87·서울 동대문구 답십리동)는 북한의 연기 통보가 믿기지 않는 듯 허공만 바라봤다.

권씨의 둘째아들 이병조씨(63)는 “어머니는 벌써부터 준비해 둔 가방을 하루에도 수차례 챙겼다 풀었다 하셨다”면서 “나도 섭섭한데 어머니는 얼마나 가슴이 아플지 안타까울 뿐”이라고 말했다.

이산가족 중 일부는 그리움과 기대가 컸던 만큼 연기 사실이 알려지자 극도의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다.

6·25 당시 20세 총각으로 혈혈단신 월남해 강원 원주시에 자리를 잡았다는 김병덕(金炳德·71·강원 원주시 태장동) 할아버지는 “도대체 이산가족을 가지고 노는 것이냐”며 “신체검사에 각종 서류 준비로 혼을 빼놓고 없는 돈 20만원까지 준비했더니 이제 와서 중단됐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한편 남한을 방문하는 북측 이산가족이 묵기로 한 서울 스위스그랜드호텔과 상봉장소인 센트럴시티 측도 이날 갑작스러운 북측의 발표에 허탈해 했다.

스위스그랜드호텔의 한 관계자는 “정부에서 아직 공식적인 통보를 받지 못해 북측 손님을 맞을 준비를 계속하고 있지만 전 직원이 맥이 풀렸다”며 “예약된 행사 5∼6건을 취소해 가면서 이번 행사 준비에 전념했는데 안타깝다”고 말했다.

<현기득·김창원기자>rati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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