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년 방북 이재운변호사의 '이별 이후 그리움의 고통'

  • 입력 2000년 8월 17일 18시 50분


15년 세월이 흘렀지만 사진처럼 선명한 그때 그 순간. 85년 9월23일 아침 고려호텔 로비,그 이별의 순간을 나는 잊지못한다.

3일전 내 앞에 나타난 아버지의 모습에 나는 숨이 멎는 듯 했다. 깊게 파인 주름, 야윈 몸. 손톱조차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말라붙은 열 손가락. 3박4일 동안 공식석상 10분 개별상봉 10분 저녁식사 한번 그리고 이제 마지막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10분. 다시 뵐 때까지 살아계셔야 한다고 50넘은 중년의 이 사내는 그만 엉엉 울었다. 아버지를 업었을 때 나무토막처럼 가벼웠던 그 휑함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날 이후 나는 산 목숨이 아니었다. 서울로 돌아온 사흘 뒤 맞은 내 생일날. 자식들이 마련해준 뷔페상 앞에서 밥 한술 넘기지 못하고 통곡했다. 아들은 이렇게 맛난 음식앞에 앉아 있는데 북에 있는 늙은 아버지는 무얼 드시고 계실까. 세상이 미워졌다. 6·25전쟁 발발직후 ‘한달만 피해 있으면 3대독자 네 목숨은 산다’며 열다섯살 어린 나를 남으로 떠나 보내셨던 아버지.

살아남기 위해 부두노동 구두닦이 등 안 해본 일이 없다. 독학으로 검정고시와 사법고시에 합격, 변호사가 된 것도 성공한 아들을 뿌듯해 하실 부모님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날 만남은 내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부와 명예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1년만에 변호사 사무실 문을 닫았다. 백방으로 아버지와 연락이 닿을 방법을 찾아보았지만 허사였다. 나는 마음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 2년뒤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몇 년간의 투병생활. 종교의 힘이 아니었다면 다시 일어서지 못했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아버지가 2년전에 돌아가셨다’는 말을 최근에 전해듣고 오히려 맘이 놓였을까. 나뿐만 아니다. 그때 함께 평양에 가 가족을 상봉했던 50명중 5명은 서울로 돌아와 북의 가족을 그리워하다 이내 숨졌고 4명은 외국으로 이민을 가버렸다.

이번에 남북의 이산가족들이 꿈에도 그리던 가족을 만났다. 그러나 한번 만나고 헤어질 거면 아예 안 만나는 게 낫다. 남북의 지도자들에게 간절히 호소한다. 지속적인 만남이 어렵다면 최소한 편지교환이라도 하게 해야한다. 국경과 장벽이 없는 이 세계화의 시대에, 제 피붙이의 소식조차 알지 못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이제는 끝내야 한다.

<허문명기자>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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