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봉 北赤명단 포함된 南쪽 혈육들 표정]

  • 입력 2000년 7월 17일 01시 27분


▼비날론 발명 故이승기박사 부인이 찾는 조카 황보연씨 ▼

“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무척 기뻐하셨을텐데….”

북한쪽 상봉신청자 가운데 합성섬유 ‘비날론’을 발명한 세계적 과학자 고 이승기박사(전 서울대공대 학장)의 부인인 황의분씨(84)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황씨의 친조카 황보연씨(62·한양대 체육학부 교수)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신청자 중 최고령인 황의분씨는 올케 강순악씨(86)와 조카 황보연 옥연씨(65·여) 등을 찾았다. 보연씨는 “아버지와 고모는 각별한 사이여서 아버지가 72년 돌아가실 때도 고모 소식을 무척 궁금해 했다”며 “우리도 이번에 상봉 신청을 했다가 떨어졌는데 고모가 우리를 찾는다니 기쁘기 그지없다”고 말했다.

특히 보연씨는 6·25전쟁 무렵 고모부이던 이박사의 집에서 함께 생활한 각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그는 “고향 김천에서 올라와 서울사대부중을 다니며 전쟁때까지 서울 청량리 고모집에서 하숙을 했다”며 “고모부가 워낙 유명한 분이라 좌익들이 고모부를 부추겨 가족 모두를 끌고갔다”고 말했다.

보연씨는 “고모도 이한기 전 국무총리와 사촌간으로 여장부 스타일이어서 내가 무척 따랐다”고 말했다.

전남 담양출신으로 서울 중앙고보와 일본 교토(京都)대학을 졸업한 고 이승기박사는 김일성이 83년 ‘북한 최고의 과학자’로 불렀을 정도로 유명했으며 96년 숨졌다. 고 이박사는 서울대 법대 백충현(白忠鉉)교수와 이화여대 음대 백의현(白義鉉)교수의 외삼촌이기도 하며 이들의 어머니인 이계남씨(86)는 95년 캐나다 국적으로 북한을 방문, 오빠 이박사 부부를 만났었다.

<서정보기자> suhchoi@donga.com

▼주영훈씨가 찾는 형 영관씨▼

“어머니가 93세까지 사시면서 기다렸는데, 조금만 일찍 오지….”

북의 동생 주영훈씨(69)가 반세기 만에 서울에 온다는 소식에 큰형 영관씨(71·서울 마포구 도화동)는 5년전 작고한 어머니 생각에 끝내 눈시울을 붉혔다. 작은 아들이 어딘가 살아 있으리라는 어머니의 믿음 때문에 영훈씨의 호적도 정리하지 않았기 때문.

전쟁이 한창이던 50년7월 동국대 2학년이던 영훈씨는 의용군으로 징집된 뒤 소식이 끊겼다. 그 뒤 영관씨는 56년 연락장교로 군에서 제대한 뒤 언론계에 투신했고 9대 유정회 국회의원과 서울신문 세계일보 논설고문 등을 지냈다.

그는 “동생의 몸 어디에 무슨 점이 박혔는지까지 기억이 생생하다”며 동생의 사진첩을 뒤적였다.

<조인직기자>cij1999@donga.com

▼안순환씨가 찾는 어머니 이덕만씨▼

북의 큰아들 안순환씨(67)가 자신을 찾는다는 소식을 들은 경기 하남시 초일동 이덕만(李德萬·87) 할머니는 모처럼 노구를 일으켜세워 감격해 했다.

그는 “먼저 간 영감은 안됐지만 나라도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을 보게 됐으니…”라며 말끝을 맺지 못했다.

이날 오후 소식이 전해지자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셋째 민환씨(59)는 집 근처에서 운영하던 식당 문을 걸어 잠그고 달려왔고 둘째 순옥(63·여), 넷째 연찬(51), 막내 원환씨(47)도 달려와 어머니를 부둥켜 안고 울음을 터뜨렸다.어려운 살림에도 공부하겠다고 서울 왕십리에서 자취하며 학교에 다니던 큰아들 순환씨는 그저 ‘공짜로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말에 해방 직후 38선을 넘었고 그것이 가족과의 긴 이별의 시작이었다.

<하남〓이동영기자>argus@donga.com

▼김점순씨가 찾는 시동생 신상철씨▼

북한의 김점순씨(67)가 찾는 시동생 신상철씨(71)는 강원도 안변 출신으로 바이올리니스트이자 한국 경음악계의 원로. 김씨의 남편이자 신씨의 둘째형인 신영철씨(74)는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로 7,8년전 평양대극장장을 지냈고 현재는 북한의 공훈예술가로 알려져 있다.

신씨는 형수가 자신을 찾는다고 하자 “형이 살아 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형의 위치를 생각해 일부러 이산가족 신청을 하지 않았는데…”라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신씨 형제가 헤어진 것은 1950년. 상철씨는 1946년 둘째형과 함께 음악을 하겠다는 욕심 하나로 상경했었다. 서울에서 신씨 형제는 서울시립교양학단의 전신인 서울관현악단 단원으로 함께 일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둘째형은 북한으로 넘어갔고 북한에서 음악을 계속했고 결혼도 했다. 신씨는 이번에 상봉을 신청한 형수를 본 적이 없다. 다만 형수 김씨가 1950년 서울 중앙여중 학생이었던 것으로 보아 그 무렵 월북한 것으로 추정할 따름이다.

<이광표기자>kplee@donga.com

▼김인수씨가 찾는 이복동생 명수씨▼

북한의 김인수(金仁洙·68)씨가 찾는 김명수(金明洙·67·광주 남구 월산동)씨는 “북한의 형이 상봉신청을 했다”는 말에 처음엔 “북한에 형제가 없는데 무슨 소리냐”고 반문했다.

그러나 김씨는 잠시 생각 끝에 “해방전 북한지역으로 간 아버지가 낳은 이복형제가 있을 수 있겠다”면서 “꼭 만나 언제 돌아가셨는지도 모르고 제사를 모셔온 아버지 소식을 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버지 김황섭(金黃攝)씨는 35년경 북한으로 갔으며 해방직후 ‘함남 홍원군에서 이발소를 하고 있다’는 편지를 보내온 뒤 감감무소식이었다는 것.

<광주〓김권기자>goqud@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