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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0년 5월 19일 19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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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서의원의 이력으로 볼 때 총재든 부총재든 당내 경선에 먼저 도전, 자기 목소리를 낼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는 4일 국회의장 출마를 공식선언했다. 왜 그랬을까.
“국회를 개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다. 국회가 입법부로서의 본분을 찾도록 개혁하는 일은 야당이자 제1당인 한나라당만이 할 수 있다. 청와대에서 내천(內遷)한 국회의장이 날치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국회를 개혁한 의장으로 남는다면 내 모든 정치인생을 걸 만하다.”
19일 기자와 만난 서의원은 “지금 국회를 개혁하지 않으면 다선이든 초선이든 17대 때 다 죽는다”고 특유의 텁텁한 목소리를 키웠다.
5선으로 50대인 서의원이 ‘입법부의 수장’을 노리는 데 대해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 15대 국회의 김수한(金守漢) 박준규(朴浚圭)의장이 모두 70대의 7선과 9선이었다. 한나라당 내에도 6선의 김영구(金榮龜) 박관용(朴寬用)부총재가 건재하다.
그러나 “국회 개혁을 위해선 국회의장의 세대교체도 필요하다”는 게 서의원의 주장. 초 재선에게 어필할 수 있고, 여당의원들에게도 ‘인심’을 잃지 않은 만큼 의장 경선에서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 그는 94년 정무1장관 시절 당시 야당이 제출한 전 국무위원(23명) 해임건의안에 대한 표결에서 294명 참석에 반대 186표로 최다 신임을 얻었다. 96년 7월 15대 국회 운영위원장 선출 투표에서 97.8%라는 역대 최고 득표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런 배경 등을 돌아볼 때 국회의장에 승부를 건 그의 흉중(胸中)은 이해되지만 당내 총재 경선을 포기한 배경에는 여전히 개운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국회의장이 돼도 결국은 한나라당에 돌아와 이총재의 집권을 돕겠다”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의문은 풀렸다. 대표적인 비주류 전사(戰士)였던 그가 이제 비주류의 길을 접은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서의원 주변에서는 “이총재와 YS의 중개역할을 통해 활로를 모색중”이란 얘기가 들려오던 터였다. 국회의장이 되기 위해선 당의 전폭적인 지원이 필요한 ‘현실’을 감안할 때 그의 변신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박제균기자> ph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