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정상회담]東西獨통일/의전문제 어떻게 했나

  • 입력 2000년 4월 10일 23시 40분


정식 국교관계가 없는 분단국간의 정상회담에서는 의전이 특히 어려운 문제다.

이 때문에 1970년 빌리 브란트 서독총리와 빌리 슈토프 동독총리 간 정상회담은 환영식은 물론 의장대 사열, 예포 발사, 모터사이클 경호가 생략된 채 진행됐다.

브란트 총리는 회담장소인 동독의 에르푸르트로 가기 위해 총리 전용 살롱기차를 타고 출발했으나 국경에서 기관차를 상대편의 것으로 교체했다.

양측이 서로 양보하기 어려운 복잡한 의전문제를 다루기 위해 동서독측은 본회담에 앞서 차관보급 실무접촉을 4차례나 가졌다. 여기서 확정돼 시행된 절차는 상당히 흥미롭다.

결국 환영식, 연회, 국가연주와 환영 간판 등은 일절 없애고 부인도 대동하지 않기로 합의됐다. 수행원도 장관급은 내독(內獨)관계장관 1명뿐이었고 속기사 경호원 등을 포함해 모두 20명에 불과했다. 가능한 한 실무형으로 축소된 브란트 총리 일행은 국경에서 동독측의 내각사무처장과 외무부 의전장, 에르푸르트역에서는 슈토프 동독 총리의 영접을 각각 받았다. 양측 총리는 짤막한 인사말과 함께 서로 회담 대표를 소개하는 선에서 첫 대면을 마쳤다.

브란트 총리는 이어 동독측 외무장관의 안내로 인근 부헨발트의 나치 시절 유대인 집단 수용소를 방문해 헌화한 뒤 회담장인 호텔로 향했다. 회담장에는 양국 국기가 나란히 놓였다.

브란트 일행의 차량과 이들이 머문 호텔에도 양국 국기가 나란히 게양됐으나 거리에는 서독기가 게양되지 않았다. 서독기가 동독 주민들의 감정에 미묘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인 것으로 전해졌다.

서독측 실무팀은 본국에서 통신장비를 가져가는 등 보안에 각별한 신경을 쓰는 한편 상대 측 협조로 직통전화를 가설해 사용했다. 또 경호용 무기는 무기명세를 상대방에 통보하고 반출입하는 등 까다로운 절차를 거쳤다. 음식은준비는 국제관례에 따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음식을 사전에 상대측에 통보해 준비에 만전을 기하도록 했다.

이같은 절차는 70, 80년대 4차례 정상회담이 양측 지역에서 번갈아 열리는 동안 거의 그대로 답습됐다.

다만 81년 12월 동베를린에서 열린 서독의 헬무트 슈미트와 동독의 에리히 호네커 간의 정상회담(3차)과 87년 9월 본에서 있었던 헬무트 콜과 호네커 정상회담(4차)에서는 속기사와 경호요원 여비서 통신요원 등 비공식 실무수행원이 크게 늘었다. 또 양측 정상의 특별기 기내 영접행사가 생기는 등 의전절차가 늘었다. 국가 연주와 의장대 사열은 87년 회담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처럼 공식의전 절차는 최소한에 그치고 실질적인 협의에 신경을 쓰는 것이 양측 모두 회담에 임하는 기본 자세였다. 그러나 정상회담에 거는 양독 국민의 기대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이것이 정상회담을 계속 이끌고 통일에 이르게 한 여러 원동력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백경학기자>stern10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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