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4.13 전국 현장을 가다] "지역감정 벽 높지만…"

  • 입력 2000년 3월 27일 23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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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부터 법정 선거운동이 시작되지만 영남의 민주당후보와 호남의 한나라당후보들은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지역감정의 벽 속에 갇혀 운동다운 운동 한번 제대로 하기가 어려운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어디를 가나 “당만 그 당이 아니라면 좋을 텐데…”라는 얘기를 듣는다. ‘적지’에서 뛰는 이들의 애로와 전략들을 모아보았다.

▲영남서 뛰는 민주당 후보들

○…대구에서 만난 한 민주당후보는 선거 때면 어떤 후보나 가장 편하게 의지하는 중고교 동문회조차 나가지 못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만나는 동문마다 “왜 호남당(민주당)으로 출마했느냐”고 핀잔을 주기 때문이다. 더러는 처지를 이해하고 동정과 격려의 말을 해주기도 하지만 대개는 비아냥거리기 일쑤다.

그는 최근 상대방 후보의 한 모임에서 참석자들이 “호남에서 90% 이상 민주당 몰표가 나올테니 우리도 전부 ○○당을 지지하자”며 노골적으로 지역감정을 조장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선관위에 고발하는 것을 포기했다. “고발하게 되면 나는 선거고 뭐고 없이 완전히 ‘왕따’가 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경남 모 지역구의 L씨는 면책 동책을 선임할 때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어 고민했다. 설사 어렵게 시켜봐야 주변에 대고 자신이 ‘L후보의 면책’이라고 밝히지조차 못한다. L씨는 결국 면책 동책을 공개적으로 구하기를 포기하고 친척이나 평소 절친한 학교 선후배들을 찾아가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요즘 자신의 조직확장이 마치 ‘피라미드식 방문판매’와 같다고 느끼고 있다. 연줄 연줄을 찾아 한 사람 한 사람 조직을 늘려 가는 것이 다단계 판매와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후보들의 선거전략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경남 창원을의 민주당 차정인(車正仁)후보는 영남에서 집권당 후보가 당선되면 누리게 될 ‘희소가치성 프리미엄’을 강조.

대구 중구의 민주당 이치호(李致浩)후보는 ‘여당 프리미엄론’과 ‘인물론’을 병행하는 전략을 쓰고 있고, 대구 달성의 엄삼탁(嚴三鐸)후보도 ‘지역 토박이로서 여당에서 힘을 쓸 수 있는 자신을 지지해 달라’는 식으로 ‘지역인물론’을 내세우는 중.

울산 남구의 민주당 이규정(李圭正)후보도 여당 프리미엄론과 정책대결을 결합한 운동으로 지역감정을 극복한다는 계획. 경남 사천의 황장수(黃壯秀)후보는 교육이나 문화 환경이 열악한 지역 실정을 거론하며 ‘민생 해결론’으로 지역바람을 잠재울 계획.

<대구·부산·울산〓선대인·권기태·이승재기자>eodls@donga.com

▲호남서 뛰는 한나라 후보들

○…어렵기는 호남의 한나라당 후보들도 마찬가지다. 중앙당으로부터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형편 속에 자금난에 인력난까지 겹쳐 악전고투하고 있다.

전남 무안-신안의 안희석(安熹錫)후보는 “유권자들을 직접 만나 호소하는 것이 운동의 전부”라고 털어 놓았다. 전남 광양-구례의 한나라당 김광영(金匡榮)후보는 “30여년 간 지역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매년 주민들에게 수천통의 우편물을 보냈다”는 점을 들어 신발이 닳도록 표밭을 누비고 있지만 “지역정서의 높은 벽을 뛰어넘기는 역부족”이라고 말했다. 전북 익산의 신이철(申二澈)후보는 지구당 조직이 줄어드는 바람에 조직을 운영하지도 못하고 가족과 친지를 총 동원해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

○…후보들을 더 지치게 만드는 것은 일각의 왜곡된 시각. 한 출마예정자는 ‘안될 줄 뻔히 알면서도 나온 것은 아무래도 중앙당으로부터의 자금지원을 염두에 두고 나온 것이 아니냐’는 얘기를 들을 때면 당장에라도 때려치우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지역감정의 벽을 조금이라도 낮추기 위해서, 그리고 언젠가는 진심을 알아 줄 날 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과 믿음을 갖고 나온 자신을 위로는 못해 줄망정 이런 시각으로 보는 것은 견디기 어렵다는 것.

물론 과거에는, 특히 한나라당의 전신격인 신한국당이나 민자당 시절에는 집권 여당이었기 때문에 중앙당으로부터의 자금 지원도 쏠쏠했기 때문에 이를 노리고 단골로 출마한 사람들도 있었던 것이 사실. 그러나 야당이 된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고 이들은 입을 모았다.

○…선거운동 전략도 거의 같은 패턴이다. “DJ가 대통령이 됨으로써 이제 한(恨)이 풀렸으니까 인물을 보고 투표해달라”는 것이 주류를 이룬다. 이제 시대가 달라졌다는 것이고 “DJ가 역사에 남는 대통령으로 책무를 다하기 위해서 호남에서 먼저 한나라당 후보가 당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광주 서구의 심안섭(沈安燮)후보는 “1개 당이 한 지역을 싹쓸이하는 것은 대통령이 주창하는 민주주의의 대의에도 안맞다”면서 이런 논리로 표심을 파고들고 있다고 전했다.

전북 정읍의 이의관(李義官)후보도 “호남에서도 야당의원을 뽑아줘야 영남에서도 여당의원을 뽑아준다”는 논리를 폈다.

<광주·전주〓박윤철·주성원기자>yc9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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