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강요된 자술서

  • 입력 1999년 6월 28일 18시 58분


북한은 불법억류한 주부 관광객 민영미(閔泳美)씨에게 ‘북측 안내원의 귀순을 유도했다’는 자술서를 쓰라고 강요한 것으로 드러났다. 연약한 여성 관광객에게 ‘귀순 공작요원’이라는 올가미를 씌우려 한 것이다. 민씨는 북한 조사원의 협박으로 공포에 떨며 내리 여섯끼를 굶어 혼절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정신적 공황상태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민씨에게 북측은 신경안정제를 주사해가며 다그쳤다.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해 탈진하자 링거 주사를 꽂았다. 그들은 오로지 민씨가 귀순공작을 했다고 자인하는 진술서를 확보하는 것만이 목표였다. 자신들이 문서로 약속한 관광객의 신변안전 보장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민씨가 계속 부인하자 북측 조사원은 같은 말을 기계처럼 반복해 물었다. 그렇게 몸과 마음 모두가 저항력을 잃은 상태에서 민씨는 북측 조사원이 불러주는 대로 받아 쓸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민씨가 6일간의 억류에서 풀려나 돌아오는 배안에서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 되뇌던 말은 그렇게 적을 수밖에 없었던 자술서에 대한 회한이었을 것이다.

강요된 자술서가 빌미가 돼 어떤 사태가 또 벌어질지 민씨는 불안해 하는 모습이다. 평범한 시민으로 어린 아들 손을 잡고 관광에 나섰던 한 주부가 남북갈등관계와 무책임한 금강산관광 사업의 희생자가 돼 버린 것이다.

북측은 이제 강요된 자술서를 들이대며 억지 주장을 펼 것이다. 우리 정부당국에는 사과를, 현대그룹에는 금전적 보상을 요구할 태세다. 이는 남북관계가 거꾸로 가도 한참 거꾸로 가는 일이다. 정부는 북측의 인권유린과 신변안전 보장 약속을 위반한 데 대해 단호하게 사과를 요구해야 한다. 만의 하나라도 북측에 막후 협상으로 돈을 주고 수습하려 한다면 그것은 주객전도(主客顚倒)요 적반하장(賊反荷杖)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대북교류에 매우 잘못된 선례를 만드는 꼴이 될 것이다. 북한은 자신들이 필요할 때마다 남한의 방북인사를 인질로 잡고 강제 자인서를 받아 돈을 요구하려 들 것이기 때문이다.

민씨의 가슴과 다리에 난 멍자국이 혼절을 깨우기 위한 자극 때문일 것이라고 의료진은 설명하지만 고문이 있었는지도 분명하게 가려야 한다. 우리는 민씨 사건으로 남북관계가 뒤틀어지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러나 철저한 진상규명과 그에 따른 책임추궁은 있어야 한다. 이런 문제들을 투명하게 정리한 뒤 남북관계가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천명한 사안별 상호주의를 제대로 실천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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