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심칼럼]「준비된 대통령」의 약속

  • 입력 1998년 1월 23일 19시 59분


김대중(金大中)차기대통령은 작년 12월19일 당선 첫 기자회견에서 다짐했다. 다시는 이 땅에 차별로 인한 대립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겠다, 바르게 살고 능력있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국민 어느 누구도 나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좌절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겠다,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성실하고 정직한 대통령으로서 모범을 보이겠다. ▼ 「한국개혁」치밀한 추진을 ▼ 진심이 짙게 묻어나는 회견이었다. 아직 대통령 취임까지는 오늘 이 시간부터 쳐도 한달이 더 남았지만 그의 대통령직은 이미 당선된 순간부터 수행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철저하게 ‘준비된 대통령’이었다. 그날부터 그는 당선자 신분으로 당장 발등에 떨어진 외환위기의 급한 불을 끄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아끼고 아꼈던 경륜을 때를 만나 일시에 풀어놓는 듯했다. 외환위기의 고비를 넘자마자 그가 꺼낸 또다른 준비된 카드가 ‘개혁’이었다. 핑계는 IMF였지만 실은 길고 긴 시간을 바쳐 완벽하게 다듬은 빈틈없는 구상처럼 보였다. 국난극복을 위한 공정한 고통분담이라는 이름의 정부개혁 재벌개혁 고용개혁이 그것이다. 각본을 한장한장 내밀듯 차례차례 개혁구상을 내놓고 IMF와 국제채권단을 들먹이며 이해당사자들을 집요하게 설득하고 다그쳤다. 그 전략과 용병술은 치밀했다. 그가 연출하는 ‘한국 개조(改造)’ 대역사(大役事)의 절정은 지난 일요일 밤 ‘국민과의 TV대화’에서 극적으로 드러났다. 그날의 ‘김대중 수사법(修辭法)’은 찬란했다. 지금의 위기는 불행한 얼굴을 하고 나타난 행복일지 모른다, 모두 고통분담에 동참해서 나라가 잘 되면 과실분배에도 동참하자, 나를 믿으라, 재임 중에 칭찬받는 대통령이 아니라 퇴임한 뒤 국민으로부터 사랑받고 존경받는 대통령, 세상을 떠났을 때 국민이 그리워하는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고 싶다. 진솔하고 간곡한 언어들이 강한 자신감과 여유있는 유머에 섞여 경구(警句)처럼 던져졌다. TV 앞에 자리잡은 국민들은 잠시 고통을 잊고 위로를 받았다. 그의 당선이 나라를 위해서 잘됐다고 생각하는 국민이 82.6%라는 한 여론조사 결과가 사실로 입증되는 듯했다. 한국의 위기는 한국의 잠재적 지도자 중 가장 잘 준비된 대통령인 김대중씨를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작년 말 워싱턴 포스트지의 예견이 적중하는 순간같기도 했다. 그러나 TV는 역시 가상(假想)의 세계였다. TV 앞에서 차기대통령과 한바탕 웃고 돌아앉아 마주한 현실은 처참했다. 실직자가 하루 3천명 가까이씩 쏟아져 나오고 올해 도산이 예상되는 기업이 5만3천개에 이를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 물가 최고 30% 앙등 가능성, 임금 적체와 삭감,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의 정리해고 또 해고. 이것이 설과 ‘자주국방’까지 앗아가는 세계화이자 외국기업이 투자하기 좋은 환경을 위한 고통이라면 우리의 희생은 정말 덧없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 국민에 일자리 줄수있어야 ▼ 차기대통령의 말대로 국민은 지금까지 속고 살았다. 책임도 없이 고통만 안았다. 그 국민에게 차기대통령은 TV에 나와 물가 9%선 억제, 중소기업 적극 지원, 노동자에 대한 최대한의 성의, 내년 하반기까지 경제 회복, ‘아버지 대통령, 아들 국회의원’으로 상징되는 친인척 부당행위 금지 등을 약속했다. 국민에게는 지금 그 약속이 어둠 속에 비치는 실낱같은 빛줄기다. 김대중차기대통령은 스스로에게 다시 한번 다짐해야 한다. 그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국민에게 주어야 할 것은 위로가 아니라 일이다. 일하고 싶은 사람에게 일자리를 주지 못할 때 그의 TV대화는 한순간을 위한 환각제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김종심〈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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