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YS 정치적관계]동지로… 라이벌로… 愛憎30년

  • 입력 1997년 12월 19일 20시 24분


김대중(金大中·DJ)대통령당선자와 김영삼(金泳三·YS)대통령의 관계는 경쟁하면서도 서로돕는 「정치적 라이벌이자 동지」로서의 애증(愛憎)으로 교직(交織)돼 있다. 두 사람은 정치역정과 스타일에서도 대조적이다. 김대통령이 정통야당인 민주당 구파의 「황태자」로 비교적 승승장구한 반면 신파의 후계자인 김당선자는 투옥 납치 등 파란의 일생을 살았다. 정치적 스타일에서도 김대통령이 순발력을 바탕으로 「감(感)의 정치」를 해왔다면 김당선자는 논리를 중시하는 타입. 두사람의 상반된 성격은 지난 80년대 중반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 공동의장으로 활동할 때 민주화 서명작업의 목표를 놓고 신경전을 벌였던 데서도 드러난다. 김당선자가 현실적 서명목표로 「1백만명」을 제시하자 김대통령이 『누가 숫자를 세어보겠느냐』며 「1천만명」을 주장, 관철했을 만큼 두사람은 사사건건 대립했다. 두사람은 67년 신민당원내총무경선에서 첫대결을 벌인 뒤 각각 「상도동계」(YS)와 「동교동계」(DJ)란 야당의 2대파벌을 이끌며 70년 야당대통령후보지명전과 92년 대통령선거에서 승패를 주고 받았다. 92년 선거패배후 김당선자의 정계은퇴선언으로 두사람의 대결은 일단 막을 내리는 듯 했으나 그의 정계복귀로 대결은 재개됐다. YS는 대통령 당선이후 줄곧 『「3김(金)시대」는 나로 청산돼야 한다』며 「DJ불가론」을 표명했었다. 하지만 한보사태와 차남 현철(賢哲)씨의 구속으로 김대통령의 정치력이 실추되면서 두사람의 대립관계는 완화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김대통령은 이회창(李會昌)후보와의 갈등끝에 지난 11월7일 신한국당을 탈당한 이후 「엄정중립」을 표방하며 검찰의 비자금수사를 중단시키는 등 DJ쪽에 호의적 태도를 보였다. 〈이동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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