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주시하는 가운데 치러진 이번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국민은 변화를 택했다. 단순한 외형만의 변화가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나라의 실질을 바꾸자는 강력한 열망을 드러냈다. 야당 대통령후보 김대중(金大中)씨의 당선은 그러한 변화에 대한 국민적 갈망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나라의 틀을 바꾸지 않고는 날로 치열해지는 국제사회 경쟁에서 민족이 살아 남을 수 없다는 긴박한 위기감이 야당에 변화의 대임(大任)을 맡긴 것이다.
▼책임정치 실현 계기▼
김대중당선자의 개인사(個人史)는 그러한 변화를 이끌 대통령으로서 손색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의 대통령 당선은 그가 우리 사회의 성벽처럼 단단한 지역 학벌 부(富) 등 숱한 편견과 차별을 딛고 권력의 정상에 도달했다는 점에서 사회로부터 소외당한 계층에 밝은 가능성을 열었다. 그것은 김대중씨 개인의 영광이자 성취일 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희망의 빛을 던지는 전환의 신호라고 할 만하다.
헌정사(憲政史)의 측면에서도 김대중씨의 당선은 중대한 획을 긋는 대사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김대중씨의 대통령 당선으로 헌정 50년만에 처음으로 실현된 여야간 수평적 정권교체의 의미는 크다.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 자체가 실질적 민주주의 구현의 신호일 수밖에 없던 우리 정치현실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운 것이다.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이제 하나의 장(章)을 접고 새로운 장정에 오른 것이며 우리 정치에 본격적인 책임정치를 실현하는 역사적 계기가 마련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적 사명을 수행할 대통령으로서 민족의 21세기를 열어갈 대임을 맡은 김대중당선자의 전도가 결코 밝은 것만은 아니다. 우선 그는 김영삼(金泳三)대통령으로부터 물려받은 「부도 한국」을 위기에서 당장 구출해내지 않으면 안된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관리체제에 들어간 국가경제를 구하고 나라의 경제구조 전반을 국제적 기준과 룰에 맞춰 새롭게 짜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에는 엄청난 고통과 희생이 따른다. 김대중당선자는 국민에게 이 고통과 희생을 요구하는 「인기 없는 대통령」이 돼야 한다.
정치적으로도 김대중당선자는 결코 행복한 처지가 못된다. 역대 대통령선거 중 가장 깨끗하고 투명한 선거를 통해 당선됐다는 점은 더없는 영광일 수 있다. 그러나 득표율이 40%를 조금 넘는 데 그쳤다는 것은 엄청난 짐이 될 수 있다. 더구나 국회 의석수로도 그는 소수정당의 지도자일 뿐이다. 투표에서 그를 지지하지 않은 60%의 유권자와 국회 의석의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는 정치적 반대파를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지가 그에게 주어진 필연의 숙제다.
김대중씨는 이번 대통령선거 기간중 유권자들에게 50년만의 여야간 정권교체를 호소하면서 집권 후 3대 약속으로 민주주의의 공고화, 사회경제적 갈등의 해소, 남북 통일기반의 정지(整地)를 내세웠다. 그리고 김대중당선자는 당선 제일성으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의 병행 발전, 바르고 능력있는 사람이 성공하는 정의로운 사회 지향, 한반도 평화와 안정 및 남북한간 교류 협력을 위한 남북한 정상회담과 특사교환을 제안했다.
이러한 국가적 과제들은 모두 국민의 자발적 동의와 협력 없이는 이뤄내기 어려운 일들이다. 김대중당선자가 첫 기자회견에서 국민에게 여러 차례 「도와달라」고 호소한 것은 그런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6.25 이래 최대의 국난 앞에서 국민은 새 대통령을 도와 국가를 위기에서 구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 문제는 국민의 이 선의를 어떻게 새로운 열정으로 결집시켜 나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성실하고 정직한 대통령으로서 모범을 보이겠다』는 김대중당선자 그 자신에게 달렸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지금까지 우리 사회를 분열로 몰아넣었던 지역 계층 정파간 갈등을 화해와 협력으로 유도하는 국민대통합의 큰 정치가 요청된다. 특히 이번 대선 결과에서 더욱 뚜렷이 드러난 동서분열을 시급히 해소하지 않고서는 국민통합은 이룩하기 어렵다. 이를 해소하고 치유하는 가장 근원적인 처방은 자원의 공정한 배분, 그중에서도 첫번째가 공정한 인사(인사)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김영삼정권의 무분별한 측근인사와 가신등용은 그런 점에서 새 당선자에게 하나의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민족도약의 갈림길▼
김대중당선자는 첫 기자회견에서 IMF와 현정부의 협의사항을 충실히 이행할 것을 거듭 다짐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한국정부와 자신에 대한 신뢰성을 높였다. 공허한 수사(修辭)를 배제한 채 국민에게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정책과제를 전반적으로 진솔하게 제시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김대중당선자가 제시한 신뢰받는 정부, 시장경제, 차별 없는 사회, 문화선진국, 안보와 평화는 우리가 21세기로 나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이뤄내야 할 과제다. 이것을 성취하는 것은 김대중씨의 몫이자 국민 모두의 몫이다.
김대중씨는 대통령에 당선된 지금 이 순간의 겸허하고 진솔한 초심(初心)을 대통령 임기 내내 한시도 잊지 말기 바란다. 우리는 지금 위기에 굴복하느냐, 다시 일어나 도약하느냐는 갈림길에 서 있다. 이번의 정권교체가 우리에게 새로운 발전의 계기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새 지도자를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겠다는 약속과 호소와 다짐을 믿고 그에게 힘을 모아주자. 역사는 우리에게 기회를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