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외국인 친구로부터 『일본인은 진흙이고 한국인은 모래다. 그래서 한국인에게는 시멘트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모욕을 느꼈던 적이 있다. 「한국인은 자율적으로는 일을 못하고 외세의 강요에 의해 타율적으로만 일한다」는 뜻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최근 외환위기를 우리 힘으로 극복하지 못하고 국제통화기금(IMF)의 도움을 받아 겨우 벗어날 수 있게 됐으니 그 외국인의 평이 틀리지는 않은 셈이다.
▼ 치러야할 대가 너무커 ▼
IMF로부터 긴급자금을 받아 잘 운용할 경우 우리 경제는 되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IMF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치러야 할 대가는 너무 엄청난 것이며 참을 수 없는 수모를 당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IMF가 요구한 대가(조건)에 일리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정부와 IMF의 협상과정에서 미국과 일본이 한국의 「국가부도」 위기를 자국의 이익을 챙기는 기회로 삼았다면 IMF의 권위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은 아닐 것이다.
물론 IMF가 요구하는 조건들은 우리 경제의 거품을 걷어내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그렇지만 국내 주가가 바닥을 기고 원―달러 환율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상황에서 외국인 주식투자 한도확대를 당장 이달부터 실시하는 것은 미 일 등 외국인들에게 한국 기업의 주식을 헐값에 사들이는 길을 터준 것이다.
하지만 누구를 탓하리오. 우리 스스로 IMF가 이번에 요구한 조치들을 일찌감치 추진했다면 금융위기도 외환위기도 없었을 것이고 이런 수모도 없었을 것 아닌가.
외환위기로까지 이어진 금융위기의 연원은 박정희(朴正熙)정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은행돈은 몽땅 권력자와 은행사람들에게 잘 보이는 사람에게만 풀려나가게 돼있었으니 나머지 기업들은 기껏 해봐야 중견기업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은행빚을 많이 쓰고 외국차관을 많이 들여오고 땅을 많이 사는 경쟁에서 이긴 자들이 재벌이 됐다.
그러나 고비용 저효율의 구조를 고치지 못해 국제경쟁력이 떨어지고 치솟기만하던 땅값마저 오르지 않게 되자 「제조업에서 밑져도 땅에서 번다」는 토지신화가 깨졌다.
이 때문에 기업부실이 생기면서 은행의 부실채권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돼 기업부도사태가 빚어지고 금융위기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한국 경제의 재벌 패러다임을 고치려는 노력은 이미 우리 정부도 추진하고 있는 것이고 자본시장의 개방 역시 세계무역기구(WTO) 및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규정에 맞추어 99년까지는 시행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새삼스레 문제삼을 일은 아니다.
▼ 관치금융 마감 계기돼야 ▼
하지만 IMF가 한국 경제의 약점을 잡고서 강압적으로 이것저것 요구하는 것은 정도가 지나치다고 본다.
국제결제은행(BIS)의 자기자본비율 규정에 따라 건전성이 취약한 국내 은행의 경영권이 결국 외국은행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 우려된다. 다만 외국은행의 본격적 상륙이 관치금융에 마침표를 찍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면 전화위복의 전기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동욱(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