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가 고문헌 수백년 지켜온 맏며느리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7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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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계 정씨 종가 유성규 여사… 진주 류씨 경성당 권보남 여사

‘한국 고문헌 명가의 날’ 행사에서 만난 초계 정씨 종가 종부 유성규 여사(왼쪽)와 진주 류씨 종가 종부 권보남 여사. 민간 고문서가 오늘날까지 전해진 데에는 종부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과 헌신이 있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한국 고문헌 명가의 날’ 행사에서 만난 초계 정씨 종가 종부 유성규 여사(왼쪽)와 진주 류씨 종가 종부 권보남 여사. 민간 고문서가 오늘날까지 전해진 데에는 종부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과 헌신이 있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집안의 유산에서 나라의 유산이 된 고문서를 수백 년간 지켜온 종갓집 며느리들의 힘은 대단했다. 14일 경기 성남시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에서 열린 ‘제2회 한국 고문헌 명가의 날’ 행사에서는 이러한 종부(宗婦)들의 노력과 헌신에 초점이 맞춰졌다.

이날 행사에 참가한 초계 정씨 종가의 종부 유성규 여사(69)는 “선대에 정희량(?∼1728) 공이 ‘이인좌의 난’(1728년)에 가담해 집안 전체가 위기를 맞은 적이 있었는데 당시 종부였던 부림 홍씨께서 집안의 문서들을 친정으로 전부 싸들고 가서 지켜냈다”고 말했다. 유 여사는 이어 “6·25전쟁 당시에 시어머니께서 피란하기 전 고택의 허름한 사당 건물 지붕 밑 등 집 안 곳곳에 문서를 숨겨둬 지켜낼 수 있었다”며 선대 종부들의 역할을 소개했다.

유 여사는 조선 중기 관료인 동계 정온(1569∼1641)의 고택인 경남 거창군 초계 정씨 동계종택을 지키는 종부. 초계 정씨 종가가 2005년 한중연에 기탁한 500여 점의 자료 중에는 정온의 선조인 정전(鄭悛)이 고려 우왕 3년(1377년)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면서 받은 합격자 명단인 ‘선광정사진사방(宣光丁巳進士방)’, 정전 정종아 정옥견 등 초계 정씨 인물들이 조선 초기 관직에 올라 받은 임명장인 ‘교지(敎旨)’ 등 당대의 문서형식과 관직체계 등을 확인할 수 있는 희귀 원본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조선 중기 학자이자 관료인 류시회(1562∼1635)의 고택인 경기 안산시에 있는 진주 류씨 경성당(竟成堂)을 지키는 종부 권보남 여사(82)도 집안의 고문서들을 정성껏 관리해왔다. 그는 “고택에서 오랜 세월 먼지가 쌓이고 습기가 찬 채로 쌓여 있는 고문서들을 일일이 꺼내 먼지를 닦고 다리미로 정성스레 펴며 문서들을 정비해온 것은 고행이었지만 큰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오랜 세월 종부들이 정성껏 지켜온 집안 고문서들의 사료적 가치는 남다르다. 진주 류씨 종가가 2003년 한중연 장서각에 기탁한 1616점의 자료 중 1589년 사마시에 합격한 동기생 5명이 1602년 평북 의주 청심당(淸心堂)에서 만나 계회를 연 기념으로 제작한 도첩(圖帖)인 ‘기축사마동방록(己丑司馬同榜錄)’은 동기 계회도로는 가장 오래되고 보관상태가 좋은 사료로 평가받는다.

요즘 종가에서는 가치 높은 문화재, 미술품 등에 대한 위조품 제작, 도난 범죄가 심심찮게 발생하곤 한다. 수백 년 동안 보관해온 의미 있는 종택의 유산들을 당대에 이르러 국가기관에 기탁한다는 사실이 아쉽지는 않을까. 두 사람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연구를 직접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동계 정온 할아버님의 초상화는 도난당해 없어지는 험한 일도 겪었는데 무척 아쉬웠어요. 힘겹게 지켜온 집안의 고문서가 좀 더 좋은 곳에서 보관되고 한국학 연구에도 도움을 준다는 사실 자체가 감사한 일이죠.”(유성규 여사)

“가치가 얼마인지, 돈이 되는지 그런 건 애당초 생각하지 않았어요. 아직 ‘한산 이씨 고행록’은 직접 간직하고 있어요. 하지만 연구에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죠. 최근 현대어로 번역돼 나왔는데 읽기 편해졌어요. 이처럼 의미 있게 활용된다는 사실 자체가 영광입니다. ‘한산 이씨 고행록’도 언젠가 마찬가지로 기탁할 겁니다. 아쉬움은 없어요.”(권보남 여사)
 
성남=김배중 기자 wanted@donga.com
#유성규 여사#권보남 여사#명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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