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년 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온 이장호 감독은 “영화도 인터뷰도 굶주려 있었다”며 그동안의 갈증을 격정적인 어조로 쏟아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이장호 감독(69)이 돌아왔다. 1995년 ‘천재 선언’ 이후 19년 만에 신작 ‘시선’을 17일 개봉한다. 올해는 그가 감독으로 데뷔한 지 40주년이 되는 해다. 4일 서울 광진구 한 카페에서 만난 이 감독은 소풍 전날 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그동안 기피한 게 아니라 못 만든 거지요. ‘천재 선언’ 이후 황석영 소설 ‘장길산’을 영화로 만들려고 판권을 샀는데, 대기업과 투자를 논의하다 잘 안 됐어요. 이상하게 준비하는 영화마다 안 됐어요.” 그는 2000∼2010년 전주대 영상콘텐츠학부 교수로 지냈다.
신작 ‘시선’은 기독교적 메시지를 외피로 두룬 작품이다. 한국의 선교단원 8명은 선교사 조요한(오광록)과 가상의 나라 이스마르로 가는데 그곳에서 현지 반군에 피랍된다. 오랜 억류와 불안감은 이들이 감춰두었던 위선과 거짓의 민낯을 드러낸다.
“감독으로서 내리막을 걸어보니 세상을 향한 시선이 달라졌어요. 내가 봐왔던 세상 그 이상이 있지는 않을까. 그러면 시선을 인간이 아닌 신의 관점으로 돌려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영화에는 노(老)감독의 지난 인생에 대한 반성이 담겨 있다. 돈 밝히는 선교사, 그동안 아내를 때렸다고 고백하는 권사, 불륜을 저지른 유부남 교인이 등장하는데 “캐릭터들에는 지나온 세월의 내 허물이 들어있다”고 했다.
“1970년대 후반 대마초 흡연 사건으로 4년간 활동 정지를 당했을 때가 오히려 축복이었죠. 데뷔작 ‘별들의 고향’(1974년)에서 신성일 씨는 가난한 대학 조교였지만, 촬영은 당시 고급 거주지였던 반포 아파트에서 했어요. 현실을 제대로 그리지 못한 거죠. 그런데 절망의 세월을 보내니 세상이 바로 보였어요.”
이후 ‘바람불어 좋은 날’(1980년), ‘어둠의 자식들’(1981년), ‘바보 선언’(1984년) 같은 리얼리즘 영화를 선보이며 그의 작품 세계는 한층 깊어졌다. 올해 초 한국영상자료원이 영화 전문가를 대상으로 설문조사해 선정한 ‘역대 한국 영화 베스트 100’에는 ‘별들의 고향’ ‘바람불어…’ ‘바보선언’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1987년) 등 그의 작품 4편이 올랐다.
이 감독의 기독교 신앙에 영향을 준 이는 초중고교 동창인 최인호 작가(1945∼2013)다. “1987년 교통사고로 50일 넘게 입원했는데 가톨릭에 귀의한 인호가 성경을 줬어요. 오만과 독선으로 가득 찼던 삶을 다시 생각하게 됐죠.”
그는 ‘시선’에 대해 “종교 영화로만 보지 말아달라”며 “고향을 잊은 사람이 추석에 고향을 떠올리듯, 이 영화를 보며 쾌락에 눈이 어두워 잊고 지냈던 마음속 본향을 떠올려 보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영화감독은 무엇으로 사는지 물었다.
“모든 예술가는 선택의 기로에 섭니다. 인위적인 아름다움을 좇을 것이냐, 자연적 아름다움을 추종할 것이냐. 현실에서는 항상 인위적 추종이 각광받아요. 하지만 감독은 사회에 기생하지 말고 끊임없이 아웃사이더가 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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