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주었구나. 고맙다"…장애인 마라토너 이야기

  • 입력 2007년 3월 14일 17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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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주었구나. 고맙다." "아저씨…."

13일 오후 2시 경기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 수원시청 앞.

당일 목표지점을 향해 다가가는 장애인 마라토너 박종암(55·호주 교포) 씨의 볼에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함께 테이프를 붙잡고 박 씨를 맞은 나혜진(23·경기 부천시) 씨의 눈시울도 점점 붉어졌다.

박 씨는 2000년 호주의 정유회사에서 일하다 산업재해로 오른쪽 발가락을 모두 잃는 장애를 입었지만 걷기 어려울 것이라는 의료진의 예상을 깨고 마라톤을 다시 시작했고, 18일 서울에서 열리는 '2007 서울국제마라톤대회 겸 제78회 동아마라톤대회' 참석에 앞서 장애인 돕기 기금 마련을 위해 1일부터 15일까지 부산~서울을 종주하고 있다.

혜진 씨와 박 씨의 만남은 동아일보 10일자 박 씨의 대전 경유 기사가 계기가 됐다. 혜진 씨의 아버지인 나정철(59) 씨는 이날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박 씨의 연락처를 물었다.

"딸(혜진)이 2004년 충남 천안에 있는 대학에 통학하기 위해 열차를 탔다가 사고를 당해 박 씨와 비슷한 장애를 입었어요. 마음의 충격으로 학교도 그만뒀고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으니…."

정철 씨는 박 씨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한 뒤 "딸을 한 번만이라도 꼭 만나봐 달라"고 간곡히 당부했다. 박 씨는 수원시청 앞 골인지점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하지만 혜진 씨는 절대 나가지 않겠다고 버텨 만남은 무산되는 듯했다. 정철 씨도 아내와 아들이 대신 약속장소로 갈 것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약속시간이 다가오자 혜진 씨가 마음의 문을 열었다. 박 씨가 골인지점에서 갑자기 눈물을 쏟아낸 것은 예상치 않았던 혜진 씨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박 씨는 자신의 장애 부위를 보여주며 혜진 씨에게 절대로 꿈과 용기를 잃지 말라고 격려했다. 정철 씨의 초청에 기꺼이 응해 집까지 찾아가 밤늦게까지 같이 식사도 하고 자신의 장애극복담을 들려주기도 했다.

혜진 씨는 14일 한층 밝아진 모습으로 친구들과 전화를 했고 어머니를 따라 미장원에 가기도 했다.

박 씨는 "13일 동안 뛰면서 여러 만남이 있었지만 혜진이와의 만남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며 "호주에서 날아온 것은 아마도 이번 만남을 위해서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정철 씨는 "혜진이가 다른 사람과 말을 한 것이나 식구들이 얼굴을 활짝 펴고 웃어본 것 모두 악몽 같았던 사고 이후 처음 있는 일"이라며 "박 씨는 장애 입은 몸으로 달리기를 하면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주고 있다"고 말했다.

수원=지명훈기자 mhj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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