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86년 김일성-고르바초프 정상회담

  • 입력 2006년 10월 24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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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북한 주석은 생전에 비행기 타기를 꺼렸다.

‘고소공포증 때문이다’ ‘열차가 경호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같은 다양한 설이 있었다. 옛 소련의 평양 주재 대사를 지낸 미하일 슈브니코프는 “척추에 문제가 있어서 비행기 착륙 때 충격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어쨌든 그런 김일성이 1986년 10월 24일 소련 모스크바를 방문하기 위해 비행기를 탔다. 서방 언론들은 ‘긴급하고 중요한 사안이 있을 것’이라며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의 정상회담 결과에 귀를 세웠다.

그러나 공개된 것은 ‘두 정상이 한국 미국 일본의 3각 군사동맹화를 비난했다’는 의례적인 내용이었다. 워싱턴 외교가에서는 “회담 결과가 크렘린의 안개 같다”고 논평할 정도.

며칠 뒤 북한 평양방송은 “김일성 주석이 소련 지도자들과 모든 문제에 완전한 합의를 보았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모든 문제’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그 짙은 안개는 1995년 방한한 고르바초프가 걷어냈다. 그는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김일성의 관심은 1988 서울 올림픽에만 있었다”고 말했다.

“서울올림픽에 소련은 참가하지 말라. 88올림픽은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화하려는 국제적 제국주의의 음모다.”(김일성)

“그런 용어부터가 구시대적이다. 우리(소련)는 지금 낡아빠진 교조주의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려고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하지 않는가. 당신이 생각을 바꿔야 한다.”(고르바초프)

“서울과 평양이 50 대 50으로 공동 주최하는 방식은 어떤가. 최소한 축구 경기는 평양에서 열릴 수 있도록 협조해 달라.”(김일성)

“올림픽 개최는 50 대 50 같은 산수의 문제가 아니다.”(고르바초프)

고르바초프는 틈틈이 김일성에게 “북한도 개혁과 개방을 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북한은 우정 있는 설복을 받아들이지 않고 (나중에) 우리를 적대시하기까지 했다”고 회고했다.

1990년 한국과 소련이 수교하자 김일성은 평양 주재 소련대사를 면담할 때조차 ‘고르바초프’라는 이름을 단 한번도 부르지 않으며 노골적인 불만을 표현했다.

김일성이 고르바초프의 충고를 곱씹어 ‘위험한 핵 도박’ 대신 ‘개혁 개방의 길’을 추구했다면 지금의 북한은 어떤 모습일까. 아버지를 닮아 비행기보다 특별열차를 더 좋아하는 아들이 국운(國運)의 선택마저 부전자전(父傳子傳)하지 않기를….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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