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개혁의 숨은 주인공]박재영씨-오상환씨

  • 입력 2000년 2월 12일 20시 07분


▼ 뇌사합법화 길 연 박재영씨 ▼

한 사람의 작은 뜻에 몇 명의 힘이 합쳐져 하나의 물방울을 이루고 이 물방울이 커져 강물이 돼 물줄기를 바꾸기도 한다.

최근 뇌사의 합법화와 국립장기관리센터의 출범, 청소년보호법의 연령기준 개정 결정에도 이러한 일반인들의 노력이 숨어 있었다.

설을 하루 앞 둔 4일 서울 강북구 우이동 한 사찰에서는 28살로 요절한 내과의사 임상순(任祥淳)씨를 기리기 위한 1주기 추모식이 조촐하게 치러졌다.

10여명만이 참석한 조촐한 행사였지만 지난해 교통사고로 뇌사상태에 빠지자 자신의 장기를 기증하겠다는 약속을 실천해 다른 사람을 살리고 숨진 임씨를 기리는 이날 추모식에는 남다른 의미가 배어있었다.

임씨의 고귀한 희생 이후 그의 연세대 세브란스의대 선배 박재영(朴宰永·30·주간 ‘청년의사’ 편집주간)씨를 비롯한 동료 의사들은 ‘내 몸을 기꺼이 환자에게’라는 기치 아래 청년의사들의 장기기증서약운동을 벌였다.

당시 임씨의 장기 기증이 실정법상 불법 행위였던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과 살아있는 사람의 장기를 사는 공공연한 장기매매를 통해 장기이식의 90%가 이뤄지고 있는 국내 의료현실을 외면해왔던 의사들의 자괴감은 이 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지난 한해에만 400여명 의사들이 장기기증서약에 동참했고 시신까지 해부실습용으로 내놓겠다고 약속한 의사도 40여명이나 됐다.

이들의 운동은 단지 장기기증자의 수만을 늘리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다. 이들은 기증의사들의 혈액형과 개인기록이 담긴 장기기증서를 접수할 정부의 공식 창구가 생길 때까지 이 기증서의 접수를 보류하는 방식으로 정부의 뇌사인정과 국가차원의 장기이식 종합관리기구 설립을 촉구했다.

그 결과 박씨는 임씨의 1주기 때 뇌사의 합법화와 국립장기이식센터 출범이라는 선물을 얻어냈다.

“아직은 절반의 성공일 뿐이죠. 비도덕적인 장기거래를 통제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는 점은 바람직하지만 민간단체와 각 종합병원별로 분산된 장기이식 데이터를 통합 운영하고 이식수술 승인절차를 신속화하는 일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박씨의 말이다.

청소년보호위에서 최근 청소년보호법의 연령기준을 생년월일을 기준으로 한 현행 ‘만19세’에서 ‘연19세’로 개정키로 결정한 뒤안에는 한 대학가 민속주점 주인의 줄기찬 문제제기 노력도 숨어있다.

연세대앞 민속주점 ‘아름나라’를 10년간 운영해온 오상환(吳相煥·40)씨는 대학생에게만 술을 팔고도 미성년자에게 술을 팔았다는 이유로 다섯차례나 수백만원의 과징금을 물면서행정소송과 헌법소원을 통해 만19세 기준의 문제점을 줄기차게 지적해왔다.

오씨는 민법상 기준으로 만 20세에서 불과 며칠이 모자란 대학 2학년생에게 술을 팔았다는 이유로 세차례나 경찰단속에 걸리자 행정소송을 내 지난해 2월 승소, 과징금을 돌려 받기도 했다.

또 지난해 9월에는 대학생 3000여명의 서명을 받아 제출한 헌법소원을 통해 “고교생 이하의 청소년을 보호한다는 법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청소년연령을 태어난 해를 기준으로 하는 연나이 19세미만으로 조정해야 한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웬만한 법학자들이나 변호사들도 거의 모든 법의 기준연령이 만나이로 돼있는 현실에서 연나이 도입은 무리라고 고개를 흔들었지만 오씨와 신촌지역 대학생들은 소신을 굽히지 않았으며 마침내 결실을 거뒀다.

오씨는 “불합리한 법때문에 문화공간을 자처해 오면서도 파렴치한 업소로 몰려 폐업위기까지 몰렸던 가게를 살릴 수 있게 됐다”며 “아름나라의 어려움을 내 일처럼 아파하고 법률자문과 소장작성에 도움을 준 연세대 법대생과 서명운동에 동참해준 신촌지역 대학생들에게 고마움을 표한다”고 말했다.

▼ '청소년 연령기준' 바꾼 오상환씨 ▼

청소년보호위에서 최근 청소년보호법의 연령기준을 생년월일을 기준으로 한 현행 ‘만19세’에서 태어난 연도를 기준으로 하는 ‘연19세’로 개정키로 결정한 배경에는 한 대학가 민속주점 주인의 줄기찬 문제 제기가 주요 동인으로 작용했다.

연세대앞 민속주점 ‘아름나라’를 10년간 운영해온 오상환(吳相煥·40)씨는 대학생들에게 술을 팔고도 미성년자에게 술을 팔았다는 이유로 다섯차례나 과징금을 내게 되자 행정소송과 헌법소원을 통해 만19세 기준이 행정편의만 감안한 조치라며 시정을 촉구했다.

오씨는 지난해 2월에는 민법상 기준으로 만 20세에서 불과 며칠이 부족한 대학 2학년생에게 술을 팔았다는 이유로 두차례나 경찰단속에 걸리자 행정소송을 내 승소했고 500여만원의 과징금도 돌려받았다.

또 지난해 9월에는 대학생 3000여명의 서명을 받아 제출한 헌법소원을 통해 “고교생 이하의 청소년을 보호한다는 법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청소년연령을 연나이 19세 미만으로 조정해야 한다”고 법개정을 촉구하고 나섰다.

술집주인으로 행정관청과 맞서야 하는 외로운 싸움에서 오씨를 도운 것은 바로 아름나라의 주고객이었던 신촌지역 대학생들.

이들은 소송 때마다 지지서명에 동참하며 국선변호인밖에 선임할 수 없었던 오씨의 소장 작성 등을 발벗고 나서 도왔다.

오씨는 “학생들이 저를 도운 것은 제 주장이 한 유흥업주의 직역이기주의적 차원이 아니라는 점에 공감했기 때문”이라며 “소장을 작성해주고 법률자문을 아끼지 않은 연세대 법대생들과 서명운동에 동참해준 신촌지역 대학생 모두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다.

<권재현기자>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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