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인생의 책]이근삼/중3때 루소 '에밀' 탐독

  • 입력 1999년 8월 20일 19시 44분


독서광, 장서광이었던 큰형님 덕분에 나는 어려서부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책을 많이 읽었다. 중학2학년때까지 일본 신초샤(新潮社)에서 34권으로 펴낸 세계문학전집을 거의 다 읽었다.

작품의 가치며 뜻도 모르고 한권 한권 이른바 독파했다는 자기만족이 당시 나의 독서하는 이유였다. 같은 반에 책 많이 읽기로 소문난 친구가 단테의 ‘신곡’을 읽었다기에 질세라 나도 그 책을 읽기로 했다. 읽었다기 보다는 읽는 시늉을 했다. 무슨 뜻인지 한줄도 제대로 이해가 안 됐지만 그 친구에게 나도 읽었다고 선언하고 싶었다. 중3때 루소의 ‘에밀’이 좋아 반 친구들과 어설픈 토론을 하던 일이 기억난다. 숨막혔던 2차대전 말기에 ‘에밀’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중학4년때 해방이 되자 나는 갑자기 문맹이 되었다. 우리 글은 물론 우리 것에 대해서는 백지상태였다. 식민지교육이 나를 병신으로 만들었다. 학교에서 목총을 들고 도둑질을 일삼는 소련병사와 대치하는 동안 읽은 책은 최남선의 ‘고사통’과 김말봉의 ‘찔레꽃’. 나에게는 어려웠고 어색한 글이었다.

47년 월남해서는 대학에서 양주동 김기림 임학수 선생님들과 가까이 지내며 우리 문학에 다소 눈을 뜨게 되었다. 이 무렵 갑자기 희곡이 좋아져 미국문화원에 들러 닥치는 대로 희곡을 읽었다. 희곡은 독자의 상상력을 무한히 확대해주는 특수한 문학이다. 이때의 습관이 훗날 나를 미국에 가 연극을 공부하게 했고 극작가로 변신케 했다.

6·25때는 군대에서 5년동안 군량미를 축냈다. 다행히 전선이 아니라 후방에 배치됐고 우연히 알게된 한 미군 대위 덕택에 나의 독서는 꾸준히 이어졌다. 책읽기를 좋아했던 그 대위는 자기 읽은 책을 다 나에게 물려 주었다. 헤밍웨이, 스타인벡의 작품을 다 읽었고 특히 그로부터 소개받은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는 나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 자서전적인 이 책은 문장도 좋았고 평범한 인생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명작이다. 나는 지금도 이 작품을 학생들에게 권한다. 이 책을 계기로 몸의 소설은 물론 희곡을 샅샅이 섭렵했다.

나의 경험으로는 방학은 교수나 학생에게 독서를 위해서는 매우 중요한 기간이다. 학생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 두권 있다. 레이먼드 윌리엄즈의 ‘문화와 사회’와 브루노스키와 마즈리시 공저인 ‘서구지성의 전통’이다. 우리말로도 번역됐다. 전자는 문화를 생활양식의 총체와 변화하는 과정으로 파악한 독창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우리 문화를 진단하는데도 많은 도움을 준다. ‘서구 지성의 전통’은 언제 읽어도 재미있다. 쉬운 문장으로 많은 일화를 곁들여 서구 지성의 맥을 잡아준다. 요즘같은 찜통 무더위 속에서는 책 읽을 생각도 못하지만 이런 가운데 나는 역자인 김종덕교수가 보내준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라는 책을 읽었다. 맥도날드 간이식품점처럼 조직화되는 사회에서 나의 존재가 한없이 서러워진다.

이근삼〈학술원회원·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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