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조야 “북핵 전제 ‘완전한 비핵화’ 실패”
본토 방위-핫라인 구축 등 위기 관리 집중
美 ‘차가운 평화’ 구상은 한국에 중대도전
북핵 위협 상시 노출 ‘얕은 평화’ 경계해야
전재성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 환경이 냉전 종식 이후 가장 근본적인 구조적 전환기에 접어들고 있다. 북한은 노동당 9차 당대회를 통해 핵보유국 지위를 되돌릴 수 없는 현실로 고착화하고, 한국을 적대적인 외국으로 규정하는 ‘적대적 두 국가론’을 대남 전략의 핵심으로 삼았다. 이는 단순히 북한이 전술적으로 변화한 게 아니라 향후 수십 년간 고수하려는 국가 생존 전략의 기틀을 제시한 것으로 봐야 한다.
최근 미국 워싱턴 조야에서는 지난 30년간 북핵 해법의 전제였던 ‘완전한 비핵화’라는 목표 달성이 사실상 실패했음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이러한 변화는 이미 미국의 전략 문서에서부터 감지되고 있었다. 최근 미 국가안보전략(NSS)과 국가방위전략(NDS)을 살펴보면 과거 단골 메뉴였던 비핵화 목표가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는 추세다. 그 대신 NDS는 북핵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미국 본토 방위와 확장억제의 신뢰성 확보라는 현실적인 억제 전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정책적 변모는 거대한 국제정치적 구조 변화와 맞물려 있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와 이란 전쟁 이후 중동의 불안정으로 인해 가용 가능한 전략적 자원이 심각하게 고갈된 상태다. 이제 미국은 중국과 러시아라는 두 거대 핵 강대국을 동시에 억제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해 있으며, 그 우선순위는 중동과 동유럽, 그리고 대중국 견제로 이동했다. 결과적으로 북핵 문제는 과거처럼 독립적이고 중대한 전략 의제로 다뤄지기보다 미국의 강대국 대응 과정에서 관리해야 할 하위 변수로 밀려나게 됐다. 미국은 이제 실패한 비핵화 정책을 냉철하게 복기하며 북한을 압박 대상이 아닌 관리 가능한 위험으로 재정의하는 실용주의적 현실주의로 선회하고 있다.
이러한 전략적 전환 속에서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들은 이른바 ‘차가운 평화(Cold Peace)’ 구상을 제안하고 있다. 북-미 간에 정상적인 외교관계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오판과 확전을 방지하기 위해 상시적인 소통을 유지하는 관계를 지향하는 방향이다.
구체적 목표로 첫째, 핵과 미사일 군비통제를 추진하려 한다. 비핵화라는 원대한 장기 목표는 규범적으로 유지하되 즉각적인 핵실험 중단, 탄도미사일 시험 및 생산 상한선 설정, 핵물질 생산 제한 등 당장의 안보 위협을 낮추는 실무적 조치에 집중한다.
둘째, 위기관리 메커니즘 구축이다. 현재와 같은 단절적인 소통 방식은 우발적 충돌이 핵전쟁으로 비화하는 것을 막기에 부족하다고 본다. 직접적인 핫라인을 통해 위기 시 즉각적인 대화가 가능하도록 노력한다.
셋째, 억제력의 재구조화다.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 미국 본토를 타격할 능력에 근접하면서 기존의 미사일 방어 체계만으로는 본토를 방어하는 데 명백한 한계가 있다는 점을 미국은 이미 인식하고 있다. 미국은 북한의 미사일 수량을 압도할 수 있는 방어망 구축을 기반으로 거부적 억제를 강화하고 있다.
넷째, 북-중-러 연대 약화 전략이다. 미국의 전문가들은 북한이 과거 강대국에 과도하게 의존했다가 이용당했던 역사를 환기하며, 북한이 삼각연대의 효용성을 의심하게 만들어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려는 유연한 외교적 공세도 고려하고 있다.
미국의 정책 변화는 한국에 중대한 도전이다. 미국이 장거리 미사일 위협 감소에 만족해 북한과의 합의를 서두를 경우, 한국은 북한의 전술핵 위협에 상시 노출되는 ‘얕은 평화’의 늪에 빠질 수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한국은 다음과 같은 주도적 대전략을 세워야 한다.
우선 비핵화 규범의 유지다. 정책 운영에서 실질적인 군비통제에 나서더라도 비핵화는 포기할 수 없는 국제적 원칙으로 남겨야 한다. 이를 포기하면 이미 위험에 처한 지구적 비확산 체제는 무력화되고 동북아시아의 핵 도미노를 자초하게 된다.
둘째, 한미 공동 대응 기획 체제의 강화가 필요하다. 미국의 대북 협상 의제와 확장억제 보완책에 대해 한국이 사전에 공동 원칙을 세우고 논의하는 체제를 강화해야 한다. 미국 본토의 안전과 한국의 안보가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협상의 핵심 명제로 삼아야 한다.
셋째, 남북관계의 새로운 개념 정립이다.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론에 장기적으로 대응하면서 통일의 로드맵을 재점검하고 강력한 억제력과 정교한 위기 관리, 기술 기반의 장기적 미래 전략을 결합하는 한국형 평화공존 전략을 구체화해야 한다.
이제 한국의 새로운 대북 전략은 좀 더 긴 시간적 지평 속에서 비핵화 원칙, 억제 능력, 국제협력, 한미동맹, 중국과의 전략 대화, 러시아와 유럽을 포함한 다층 외교, 북한 변화에 대한 장기적 준비, 인공지능(AI) 시대의 기술 우위를 결합하는 다층적 전략으로 나아가야 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