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에서 ‘헌팅’, 낯선 연애 풍경… 90년대 오렌지족은 거리서 ‘야타’
세대별 사랑 방식은 바뀌기 마련
책이 소유 아닌 자기 표현 된 시대… 디지털 피로에 대면 욕구도 겹쳐
논란에도 MZ의 현실적 만남 전략
최근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대형서점이 이성의 휴대전화 번호를 물어보는 이른바 ‘번따 성지’로 떠오른 가운데 이를 풍자한 ‘SNL 코리아’의 한 장면. 쿠팡플레이 제공
《서점이 활용되는 새로운 방식
최근 한 예능 프로그램에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는 독특한 독서 문화가 소개됐다. 서울의 한 대형서점이 이성의 전화번호를 따는 성지가 됐다는 내용이었다. 독서 인구가 줄고 있다고 서점이 이성 교제의 장으로 급부상하는 현상을 마냥 반가워만 할 수는 없다.》
강용수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원 세대 차이는 같은 사안을 바라보는 나이 든 사람과 젊은 사람의 생각 차이에서 분명해진다. 나이 든 세대는 팬데믹을 겪으면서 비대면과 고립을 경험했던 MZ(밀레니얼+Z)세대의 새로운 사랑법이 잘 납득되지 않는다.
1990년대 오렌지족이 유행했다. X세대를 주도하던 서울 강남 부유층 자녀들의 소비문화는 기성세대에 충격을 안겼다. 특히 부유층 유학생 사이 이러한 경향이 뚜렷해 오렌지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당시 오렌지는 비싸고 귀한 수입 과일이었고, 유학생들이 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LA) 근교 오렌지 카운티에 많이 거주하기도 했다. 오렌지족은 평범한 삶을 거부하며 파격적인 의상을 선호했다. 찢어진 청바지나 노출이 심한 옷을 당당하게 입고 다녔다.
오렌지족은 20대 초중반의 나이에도 부모의 부에 기대 명품, 외제차, 양담배, 양주를 살 여유가 있었다. 이들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을 중심으로 자유분방한 쾌락주의를 과시했다. 소비와 유흥이 세상의 전부인 듯한 행태는 많은 이들에게 부러움과 박탈감을 동시에 안겨줬다. 6·25전쟁을 겪은 부모 세대가 피땀 흘려 번 돈을 자녀들이 물 쓰듯 쓴다는 것은 당시 이례적인 모습이었다. 이에 오렌지족은 사회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압구정동을 중심으로 한 유흥 문화는 경기 호황기 덕분에 가능한 현상이었다. 남자 오렌지족들은 외제차를 타고 가며 예쁜 여성들에게 말을 걸기도 했는데, 이때 ‘야타족’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나기도 했다. 신인류를 자처하며 자유분방함을 뽐내던 오렌지족들은 이제 어느덧 50세를 넘긴 나이가 됐다. 그들에게 자녀가 있다면 MZ세대인 20대가 많을 것이다.
요즘 서점이 이성 교제의 장으로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1980, 90년대 책은 장서 개념으로 전집 형태로 사는 경우가 많았다. 도서관 못지않게 집에 책이 가득히 쌓여 있으면 주변으로부터 부러움과 함께 존경을 받았다. 최근에는 책이 소유 개념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표현하는 도구가 되고 있다. 책이 자신의 취향과 교양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된 것이다. 최근 ‘텍스트 힙’(텍스트+힙하다)이라는 말을 쓴다. 젊은 층이 일종의 유행처럼 책을 소비하는 방식을 말한다. 이러한 영향으로 서점이 책만 읽는 공간이 아니라 자기를 표현하고 과시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확장됐다. 또한 책을 읽는 사람에게는 지적이고 성실하다는 이미지가 따라붙어 비슷한 성향의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도 크게 작용한다.
교보문고 곳곳에 비치된 ‘독서공간 에티켓’ 안내문. 불편을 주는 ‘서점 번따’를 우회적으로 경고하는 내용이다. 동아일보DB이성이 서로 호감을 갖고 만남의 기회를 가지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소셜미디어로만 연결되는 비대면 만남은 결핍되는 부분이 많다. 진실한 인간관계가 몇 줄의 다이렉트 메시지(DM)와 이모티콘 몇 개로 만들질 수 있을까. 모든 일에는 정성과 수고가 필요하다. 디지털이 주는 편리함의 시대는 오히려 인간미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이성 간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 주도권을 잡기 위한 여러 가지 팁들이 공유되고 있다. 가령 메시지에 대한 답을 빨리 하지 말고 몇 시간 후나 그다음 날에 해야 상대방이 자신을 쉬운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는 이른바 ‘밀당의 기술’ 등이 그렇다.
이러한 답글의 시차로 생기는 피로감 등은 상대방을 직접 만나면 사라진다. 얼굴을 보면 상대방을 이해하는 일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디지털과 가상공간에 지친 MZ세대가 대면으로 친밀감을 형성할 수 있는 만남의 장소가 필요하다 보니 서점을 선택하게 된 것은 아닐까. 그러나 독서에 몰입하는 조용한 서점에서 상대방의 동의 없이 불쾌감을 주는 이른바 ‘헌팅’ ‘번따’(번호 따기)가 이뤄지는 것을 두고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이 많다.
반면 이를 MZ세대의 새로운 소통 방식으로 이해하자는 의견도 있다. 만남의 기회가 적은 시대에 생겨난 유행이라는 점에서다. 이에 이를 무조건 금지시키기보다는 선을 넘지 않도록 안내문을 게시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서점은 클럽이나 소개팅 애플리케이션(앱)보다 건전한 만남이 성사될 수 있는 곳이다. 취향이나 생각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또 직접 소통이 서툰 세대에게는 대면 만남이라는 점에서 훨씬 생산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따라서 대형서점이 이른바 ‘자만추’, 즉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는 흐름을 인위적으로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각종 플랫폼의 범람에도 아이러니하게 청춘 남녀가 자연스럽게 만날 기회는 되레 줄어드는 현실이 안타깝기도 하다. ‘야타’가 1990년대 오렌지족이 경기 호황기에 외제차로 했던 사랑법이었다면, ‘서점 번따’는 2026년 경기 침체기의 사랑법이다. 예전처럼 술과 유흥으로 이어지는 만남을 좋아하지 않는 MZ세대의 교제 방식은 젊은 세대가 스스로 결정할 일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