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폐가처럼 방치된 현충시설들, 잡초에 묻힌 ‘광복 80년’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8월 17일 23시 24분


남귀우 춘천항일애국선열유산지킴이 운영위원장(61)이 13일 강원 춘천시 박화지 의병장 묘소 앞에서 독립 유적지 발굴·관리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춘천=서지원 기자 wish@donga.com
남귀우 춘천항일애국선열유산지킴이 운영위원장(61)이 13일 강원 춘천시 박화지 의병장 묘소 앞에서 독립 유적지 발굴·관리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춘천=서지원 기자 wish@donga.com
경기 화성시 3·1운동 만세길을 걷다 보면 기와와 흙벽이 무너져 내린 고택이 나온다. 누가 봐도 잡초만 무성한 폐가이지만 뽀얀 먼지와 거미줄에 뒤덮인 문패를 닦고 보면 놀랍게도 ‘독립유공자의 집’이다. 1919년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차병혁 선생의 생가다. 유관순, 이회영, 윤동주 선생과 같은 등급의 훈장을 받은 독립투사의 생가가 흉가처럼 방치돼 있는 것이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광복 8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부가 지정한 전국의 현충시설 11곳을 찾아가 보니 모두 차 선생 생가와 다를 것이 없었다. 일왕의 은사금을 거부하고 순국한 애국지사 최우순 선생의 사당인 경남 고성군 서비정은 기와 대신 가림막과 폐타이어로 간신히 비를 막고 있었다. 을미의병 춘천 의병장 이소응 선생의 강원 춘천시 남산면 생가 터는 펜션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어 인근 주민들도 “독립지사의 생가 터인지 전혀 몰랐다”고 했다. 제주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이끈 김장환 지사의 조천리 생가는 지붕이 무너져 있고, 법정사 항일운동을 이끌었던 강창규 지사의 오등동 생가 터도 쓰레기만 가득했다.

이처럼 훼손된 채 방치된 독립운동 유적들은 모두 개인 소유다. 전국의 현충시설 1001곳 중 436곳이 사유지인데 정부가 현충시설로 지정하면 관리는 소유자가 맡는다. 하지만 젊은 후손들은 도시로 떠나고, 남아 있는 후손들은 고령이거나 형편이 어려워 제대로 손을 쓰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나마 후손이나 소유자가 신청하지 않아 현충시설로 지정되지 않은 독립유적들도 있다. 호남의병 총사령부 격인 호남창의회맹소 결성지였던 전남 장성군 석수암은 2020년 발굴 조사를 마쳤지만 현충시설로 지정되지 않아 표지석도 없이 예비군 훈련장으로 쓰이고 있다.

빛을 되찾은 지 80년이 흘렀는데 아직 빛을 보지 못한 독립유적들이 있다니 부끄러운 일이다. 고령의 후손들마저 가고 나면 현충시설 발굴과 입증 자료 수집은 더욱 어려워지고 항일 영웅들의 자취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독립운동 유적의 발굴과 관리를 후손들에게만 맡겨둘 일이 아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체계적으로 발굴해 독립투사들을 기억하고, 그 고귀한 정신을 계승하는 살아 있는 역사 교육의 현장으로 관리해야 한다.


#현충시설#광복 80년#방치#독립운동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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