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스 “내 처지 모를 때 공정한 원칙 도출”
윤리적 딜레마서 ‘무지의 베일’ 적용하면
통상 사회 전체 이익 극대화하는 결정 내려
탄핵 선고 뒤 열릴 개헌 논의에서 적용돼야
이은주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어렸을 적 자주 먹었던 아이스크림 중에 ‘쌍쌍바’라는 것이 있었다. 나무위키에 따르면 쌍쌍바는 1979년부터 생산됐는데, ‘한 아이스크림을 쪼개서 둘이 나눠 먹는다’는 콘셉트가 특징이다. 이 설명만 들으면 콩 한 쪽도 나눠 먹는 흐뭇한 광경을 떠올릴 수 있겠으나, 현실은 그보다 냉혹했다. 가끔 이 쌍쌍바를 나눠 먹어야 할 때가 있었는데, 문제는 정확히 반반으로 나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점이다. 서로 손톱만큼이라도 더 큰 쪽을 차지하려다 보면, 그나마 있던 우애도 깨지기 십상이라 우리는 쌍쌍바를 쪼개지 않은 사람이 먼저 두 조각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는 규칙을 만들었다. 쪼개는 사람은 자신이 어떤 반쪽을 차지하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공평하게 나누려고 애쓰기 마련이었다.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은 미국 정치철학자 존 롤스가 1971년 출간한 ‘정의론’에서 제시한 사고 실험이다. 어떤 사회에서 정의로운 원칙을 도출할 때, 구성원들이 자신이 실제로 어떤 상황에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규칙을 설계할 경우 공정성을 담보할 수 있다고 본다. 즉, 자신의 인종, 성별, 교육 수준, 재산, 건강 상태 등을 모르는 ‘무지한’ 상태에서는 이해관계에 영향을 받지 않고 공정하게 게임의 법칙을 구상할 수 있고, 그 결과 합의되는 원칙들은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유리하거나 불리하지 않은 공정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미 아득한 옛날 일처럼 느껴지지만, 코로나19 백신이 처음 수입됐을 때 누구에게 먼저 백신을 제공할 것인가에 대해 갑론을박이 있었다. 미국 하버드대 연구진은 팬데믹 시기 중환자용 인공호흡기가 부족한 상황에서, 25세 젊은 환자와 65세 노령 환자 중 누구에게 의사가 마지막 남은 인공호흡기를 제공하기를 원하는지 실험 참가자들에게 물었다. 실험 결과, 질문을 받기 전에 본인이 65세일 확률과 25세일 확률이 반반이라고 상상하도록 한 경우(무지의 베일 조건) 더 많은 실험 참가자가 환자의 생존 연수를 극대화하는 공리주의 원칙에 따라 젊은 환자에게 인공호흡기를 주도록 권유하겠다고 답했다.
이러한 효과는 노년(60세 이상) 응답자에게서 더 크게 나타났다. 본인의 나이에 대한 별도의 언급이 없는 경우, 노년 응답자의 33%만 젊은 환자에게 인공호흡기 주는 것을 선호했다. 하지만 본인의 나이가 25세일지, 65세일지 모른다고 가정하게 되자 노년 응답자의 무려 62%가 젊은 환자에게 인공호흡기를 제공해야 한다고 답해 다른 연령대의 응답자들과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즉, 희소한 자원을 배분함에 있어 자신이 어떤 조건에 해당하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 사람들은 개인적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사회 전체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다른 연구에서는 다양한 윤리적 딜레마 상황에서 무지의 베일이 개인의 결정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검증했다. 예컨대, 고전적인 ‘트롤리 딜레마’에서는 달리는 기차를 그대로 두어 다섯 명의 인부를 죽게 내버려 둘 것인지, 아니면 선로를 바꿔 작업 중인 한 명을 죽게 할 것인지를 물었다. ‘자율주행차 딜레마’의 경우 자율주행차에 문제가 생겼을 때 9명의 행인을 치어 사망하게 할 것인지, 아니면 벽을 들이받아 운전자가 사망하게 할 것인지를 물었다. 딜레마의 내용과 무관하게 무지의 베일을 적용한 참가자들, 즉 본인들이 각 시나리오에서 어떤 사람에 해당하는지 모른다고 가정한 이들은, 그런 가정을 하지 않은 이들에 비해 다수의 이익을 택하는 확률이 높았다(물론 다수 행인의 안전을 우선시하는 것이 옳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모든 것에 앞서 운전자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자율주행차를 구매하고자 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지만 말이다).
형사사법 분야에서도 무지의 베일은 공평하고 균형 잡힌 법체계를 구상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입법자가 자신이 범죄 피해자일지, 혹은 억울한 피의자일지 알 수 없는 상황을 가정해 보면 누구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원칙을 세우려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간에, 조만간 개헌 논의가 수면 위로 떠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논의에 참여하는 여야 정치인들 모두 무지의 베일을 쓰고, 보다 공정하고 우리 사회 전체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지혜를 모아줄 것을 간곡히 당부하고 싶다. 권력을 잡을 것으로 전제하고 만든 법이 얼마나 허점투성이인지 이미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을 보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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