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페미니스트 외교’ 바람[특파원칼럼/조은아]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3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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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 등 ‘여성의 날’ 맞아 젠더 정책 발표
韓, 생산성 높이려면 성평등 정책이 답

조은아 파리 특파원
조은아 파리 특파원
“세계 여성의 날은 장관만을 위한 날이 아니죠.”

9일(현지 시간) 이라크 북부 쿠르디스탄 지역 카디아 난민캠프에 도착하자마자 아날레나 베어보크 독일 외교부 장관(42)은 받은 꽃다발에서 떼어낸 꽃을 주변 사람들에게 한 송이씩 나눠 줬다. ‘세계 여성의 날’(8일)을 함께 기리자는 의미였지만 그 이상의 뜻을 담고 있다.

베어보크 장관은 이라크 방문 중 수니파 극단주의 테러조직 이슬람국가(IS)에 납치돼 성폭행당한 야지디족 여성들이 낳은 아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이라크 당국에 촉구했다. 앞서 야지디족은 “여성이 성폭행으로 낳은 아이는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밝혔다. 자신이 “다루기 어려운 이웃 나라”라고 부른 이라크에서 여성 인권 문제에 돌직구를 날린 것이다.

독일 최연소 장관이면서 첫 여성 외교부 장관인 그는 이달 초 ‘페미니스트 외교정책’을 공식화했다. 성평등을 우선시하는 외교를 하겠다는 취지다. 독일 국내는 물론이고 여성 인권 침해가 심각한 외국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외교정책을 펴겠다는 뜻이다. 프랑스 스페인 캐나다 멕시코 등이 페미니스트 외교정책을 밝힌 가운데 유럽 제1의 경제 및 외교 대국 독일의 가세로 작지 않은 파장이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90쪽에 이르는 독일 페미니스트 외교정책 지침에는 ‘해외 공관에서 젠더 관련 행사를 열 것’ 같은 구체적 사안들이 깨알같이 들어 있다. 독일 정부는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2023년도 유엔여성기구 기금에 2600만 유로(약 366억 원) 제공을 약속했다고 발표했다.

외교 정책에 가려져 부각은 안 됐지만 독일은 국내에서도 성평등을 강조하고 있다. 올라프 숄츠 총리는 남녀 장관 각 8명으로 내각을 출범시키며 “여성과 남성이 인구 절반을 각각 차지하니 (내각에서도) 여성이 절반의 힘을 얻어야 한다”고 말했다.

독일 정부가 성평등 정책을 강조하는 이유는 여전히 여성 차별이 심각하다고 판단해서다. 독일에서도 최근 여성 4명 중 3명꼴로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고 있지 않다”고 응답한 여론조사가 발표됐다. 독일 통계청에 따르면 2022년 여성의 시간당 평균임금은 남성보다 18%가량 낮았다.

독일만 특별한 길을 걷는 게 아니다. 세계 여성의 날을 전후해 유럽 국가들은 다양한 성평등 정책을 내놓았다. 스페인은 정치 산업을 비롯한 사회 각 분야에서 남녀 비율을 동등하게 맞출 것을 의무화하는 ‘동등한 대표성 법안’을 내놨다.

여성 관리자 비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낮은 한국은 어떨까. 윤석열 정부 들어 성평등 정책이 홀대받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정부가 유럽 선진국들처럼 여성 쿼터제나 페미니스트 외교정책을 도입해야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여성 차별이나 여성 인력 활용에 대한 해법이 필요한데 보이질 않는다. 세계 여성의 날 전후로도 기획재정부 고용노동부 같은 관련 부처에서 관련 성평등 정책을 발표하지 않았다.

정부는 노동생산성 개선을 위해 근로시간 규제 완화 필요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정작 전문가들은 근로시간 규제가 아닌 성평등 제도가 해법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최근 기자가 만난 OECD 한국경제 담당관은 “노동생산성을 높이려면 근로시간 규제보다 경력 단절 여성을 활용하는 방안이 더 시급하다”고 조언했다. 육아 때문에 일터에 복귀하기 힘든 여성들이 마음껏 일하도록 재택근무와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활성화하면 노동생산성도 올라간다는 얘기다. 정부가 진영 논리에 갇혀 핵심적인 해법을 놓치는 건 아닌지 살펴보길 바란다.


파리=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유럽#페미니스트 외교#여성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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