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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오늘과 내일/박용]‘집값 호러쇼’의 연출자들

입력 2023-01-25 03:00업데이트 2023-01-25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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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분양 공포에 또 ‘빚내서 집 사라’ 신호
억지 집값 떠받치기로 침체 장기화 우려
박용 부국장박용 부국장
세계 곳곳에서 ‘집값 호러쇼(house-price horror show)’가 벌어지고 있다. 중앙은행이 금리를 가파르게 올리자 미국 뉴욕부터 대한민국 서울까지 집값이 추락하고 있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집값 호러쇼에 따른 고통 강도가 최근 집값 상승 폭, 소득 대비 가계부채, 금리 인상 반영 속도 등 3가지에 달려 있다고 진단했다. 이 기준만 놓고 보면 한국은 혹독한 ‘집값 호러쇼’가 연출될 가능성이 있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지난해 10월 서울의 가구소득 대비 주택가격비율(PIR)이 “현재 18인데, 금융위기 직전(8배)보다 높다”고 우려했다. 그만큼 소득보다 집값이 가파르게 올랐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는 106%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빠르게 집값이 오르는 동안 ‘빚으로 만든 집’이 수두룩하다. 미국은 주택담보대출이 30년 만기 고정금리가 대부분이지만 우리는 변동금리 비중이 77.9%다. 기준금리가 오르면 대출 금리도 동반 상승해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 투자) 집주인들은 불어난 이자 부담에 밤잠을 설쳐야 한다.

2008년 금융위기를 겪고도 가계부채 관리에 다시 실패해 집값 호러쇼를 걱정해야 할 처지다. 그런데도 그 책임을 피하기 어려운 전 정부 인사들은 자기 보호를 위한 ‘세력화’에 급급하고, 물가를 잡으려고 금리를 올리는 판에 야당은 또 돈을 풀어야 한다며 무책임한 정치 공세를 펼치고 있다. 권력을 넘겨받은 여당과 실상을 아는 관료집단은 빚으로 지탱하고 있는 주택시장이 임기 내 무너질까 봐 전전긍긍하며 규제를 풀고 또 ‘부동산 거품기’를 돌리고 있다.

둔촌주공 재건축 아파트(올림픽파크포레온) 미분양 우려가 커지자, 정부는 중도금 대출 규제와 전매 제한 완화, 실거주 요건 폐지 등을 핵심으로 하는 ‘1·3 부동산 대책’을 급히 내놨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빚을 내서 집 사라는 게 아니다”라고 했지만 시장은 ‘당첨자들이 돈이 모자라면 은행 대출을 받아 중도금을 내고, 잔금은 세입자가 가져온 보증금으로 치르고, 그마저 부담이 되면 1년 있다가 집을 팔아도 된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정부의 파격적 규제 완화에도 둔촌주공 당첨자의 약 30%가 계약을 포기한 건 분양가가 너무 비싸고 부동산 시장 침체의 골이 더 깊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실수요자가 적지 않다는 뜻이다. 규제 완화 기대감에 집주인들이 매물을 거두고, 대출을 받아 집을 살 수밖에 없는 실수요자들은 집값이 더 떨어지길 기다리며 매수를 미루면 거래는 끊긴다. 공인중개사 수입도 사라지고, 이삿짐센터나 인테리어 가게는 할 일이 없어진다. 가구나 가전제품도 팔리지 않는다. 소비는 더 가라앉는다.

이자 부담이 커진 대출자를 지원하는 ‘핀셋 대책’과 급격한 집값 하락을 막는 연착륙 대책이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지나치면 독이 된다. 규제를 성급하게 풀고 다주택자 투기 수요를 끌어들여 억지로 집값을 떠받치면 경착륙은 피할 수 있을지 모르나 경기 침체와 가계 부채의 늪을 더 깊게 만들 수도 있다.





금융위기 때는 집값 하락이 금융시스템의 붕괴로 이어질 뻔했다. 현재는 은행들의 건전성이 훨씬 나아졌다. 금융 안정이라는 나무만 보다가 경기 침체라는 숲을 보지 못하는 오류는 피해야 한다. 집값이 급락하면 부실 건설사나 금융사가 쓰러지는 고통이 따르지만 옥석 가리기가 끝나면 대기 중인 실수요가 유입돼 거래가 살아나고 시장이 단기 회복될 여지도 생긴다. ‘나 때는 안 돼’라며 부실 투자자들에 대한 구조조정을 또 미루고 규제를 풀어 억지로 집값만 떠받치려고 들다간 ‘집값 호러쇼’의 공동 연출자라는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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