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광기인가 오판인가 [횡설수설/이정은]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0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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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슨 대통령이 요즘 스트레스가 많다. 밤에 종종 술을 마신다.” 미국이 베트남전 출구 전략을 모색하던 1970년대 초 헨리 키신저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소련의 협상 상대들에게 이런 내용을 흘렸다. “통제 불가능하니 조심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충동적으로 변한 닉슨이 언제라도 핵 단추를 누를 수 있다고 경고한 것이다. 미국은 이렇게 소련을 움직여 북베트남을 협상장에 나오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미치광이 전략(The madman theory)’은 자신을 비이성적인 위험인물로 포장한 뒤 협상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가는 전략이다. 예측 불가능한 극단적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공포를 유발하는 것이다. 서로가 극단으로 치닫는 치킨게임에서 효과를 보는 벼랑 끝 전술이다. 미치광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독재자들의 경우 이 전략을 쓰는 건지, 아니면 실제 정신에 문제가 있는 건지를 놓고 외부 전문가들 간 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북한의 김정일, 김정은 부자(父子)는 미치광이 이론의 분석 대상으로 가장 많이 오르내렸던 사례다. 은둔형 독재자의 무모한 도발과 위협, 핵무기 집착을 놓고 “미쳤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그런 북한을 향해 미치광이 전략으로 맞대응했던 이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다. ‘화염과 분노’ 시기 “김정은보다 더 큰 핵 단추를 갖고 있다”며 긴장감을 급격히 끌어올렸다. 트럼프 본인도 좌충우돌 정치 행보를 놓고 ‘광인’이라는 비판과 ‘미친 척하는 냉철한 비즈니스맨’이라는 평가를 동시에 받았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불러일으킨 ‘미치광이 지도자’에 대한 공포는 차원이 다르다. 6000기에 가까운 핵무기를 보유한 러시아의 지도자가 핵전쟁 위협을 넘어 실제로 전술핵을 터뜨릴 기세다. 2월 우크라이나 침공을 감행했을 때 이미 편집증, 과대망상증 같은 정신이상설이 불거졌다. 중언부언하는 연설을 지켜본 외신들이 “뭔가 달라졌다”며 코로나19 시기 크렘린궁에 고립돼 있던 그의 심리 상태에 주목했다. 예스맨 측근들에게 둘러싸여 현실 감각도 약해져 가고 있다는 게 서방 정보기관들의 판단이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최근 CNN 인터뷰에서 푸틴에 대해 “매우 잘못 판단하고 있는 이성적 행위자”라고 말했다. 푸틴이 이성을 잃지 않은 지도자라고 인정하며 다독이는 동시에 ‘이성을 되찾고 더 이상 전세를 오판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내려 한 것으로 보인다. 광기이든 오판이든 위태로운 지도자의 손에 들린 핵 카드의 위험성은 다르지 않다. 전 세계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가는 자멸적 도박은 당장 중단돼야 한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푸틴#광기#오판#미치광이#이성#자멸적 도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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