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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광화문에서/박선희]‘조용한 퇴사’와 ‘조용한 해고’… 침묵의 악순환을 이기는 법

입력 2022-10-06 03:00업데이트 2022-10-06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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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희 산업2부 차장
여름휴가 때 찾았던 강원도 작은 호텔 조식당에서 ‘조 주임’을 만났다. 그를 기억하는 이유는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직원들이 그를 찾아서였다. 국이 쏟아졌을 때, 과일이 동났을 때 모두 조 주임만 불러댔다. 그때마다 그는 쏜살같이 나타나 문제를 해결했다. 그리고 테이블의 빈 접시를 일사불란하게 수거했고, 정상회담 막후 의전에 임한 것처럼 진지한 태도로 손님들을 자리로 안내했다. 그는 그 순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데 조금의 의심도 품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

휴가 중이었지만 조 주임 덕분에 ‘일의 의미’란 오래된 질문을 스스로에게 다시 던지게 됐다. 작은 일에 그렇게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본 게 오랜만이었다. 일의 가치가 훼손된 시대였다. 일은 돈 버는 수단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자아는 일로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일해서 번 돈을 쓰며 실현하는 거였다. 사람들은 지쳤다. 주어진 최소한의 일만 하겠다는 ‘조용한 퇴사(Quiet quitting)’는 이런 기조의 연장선에서 나왔다.

직원들이 ‘조용한 퇴사’로 일종의 사보타주를 시작하자 고용주 측은 ‘조용한 해고(Quiet firing)’로 맞불을 놨다. 포브스에 따르면 2년 연속 연봉 동결, 승진 누락, 성장 기회 박탈과 업무 피드백에서의 제외 등이 조용한 해고의 무서운 징후들이다.

‘조용하다’는 것 외에 이 둘은 위해성 측면에서 강력한 공통점이 있다. 마음은 콩밭에 있으면서 시간만 때우는 근로자나, 직원이 제 발로 관둘 때까지 고의로 방치하는 관리자나 조직 전체의 성과와 문화를 파괴하는 건 마찬가지다. 연구에 따르면 부정성의 전염력은 긍정성보다 4배나 높다. 코로나19의 긴 터널 끝에 다시 일터로 돌아온 사람들이 이처럼 조용한 해악의 대유행 속에 놓여 있다는 건 유감스러운 일이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이런 악순환 속에서 잊혀진 일의 본질을 다시 보게 한다. 월터는 폐간을 앞둔 잡지 ‘라이프’의 필름 관리자다. 새 경영진은 유명 사진가가 ‘삶의 정수를 담았다’고 한 미지의 작품을 폐간호 표지로 싣기로 하고 그를 해고한다. 영화 마지막에야 작품의 정체가 드러난다. 정오의 햇살 속에서 골똘히 필름을 들여다보는 월터의 모습이다. 사진가는 마치 히말라야의 눈표범을 찍을 때처럼 숨죽여 일하는 월터의 모습을 포착했다. 삶(life)의 진짜 가치를 아는 이들에겐, 누가 알든 모르든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한 그가 눈표범처럼 아름다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코로나19 덕분에 사람들은 인생에서 일보다 중요한 게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의미 있는 일만이 삶을 의미 있게 한다”는 스티브 잡스의 말은 더 이상 정답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용한 퇴사나 조용한 해고에도 세상을 바꾸는 힘 같은 건 없다. 엔데믹 시대에도 변치 않는 사실은 이곳을 좀 더 낫게 만들어 온 건 언제나 조 주임과 월터 같은 사람들이었단 사실뿐이다.


박선희 산업2부 차장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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