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안 가고, 덜 쓰자”… 인플레시대, ‘짠내’ 물씬 파리 바캉스[글로벌 현장을 가다]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7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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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 센강 변 축제 ‘파리 플라주’를 찾은 사람들이 그늘 아래 캠핑용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다. 관광객 말고도 가족 단위 시민들이 많았다. 파리=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24일(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 센강 변 축제 ‘파리 플라주’를 찾은 사람들이 그늘 아래 캠핑용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다. 관광객 말고도 가족 단위 시민들이 많았다. 파리=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조은아 파리 특파원
조은아 파리 특파원
《“요즘 물가는 오르고 폭염도 심해서 멀리 못 가요.” 24일(현지 시간) 오후 3시경 프랑스 파리 센강 퐁뇌프다리 아래서 만난 대학생 마테오 씨가 말했다. 친구들과 바캉스 기분을 느끼려 이곳에 들렀다는 그는 “프랑스 남부로 휴가를 가려 했는데 폭염 때문에 포기하고 대신 가까운 북부 노르망디 여행을 다녀왔다”며 “하루 80유로(9만3000원) 정도이던 노르망디 호텔 숙박료가 140유로(약 18만6000원)나 했다”고 말했다. 그는 계획만큼 누리지 못한 여름 여행의 아쉬움을 파리에서 달랬다.》





이날 센강을 따라 ‘파리 플라주’가 열리고 있었다. 파리 플라주는 매년 여름 센강 변에 인공 모래사장과 다양한 즐길거리를 갖춰놓고 즐기는 축제로 다음 달 21일까지 열린다. 강변에 줄줄이 늘어선 파라솔 밑 선베드에서는 수영복 입은 시민들이 뜨거운 햇볕을 만끽하고 있었다. 최근 최고기온이 섭씨 40도를 넘은 파리에는 거리 곳곳에 찬물을 뿜어내는 분무기가 등장해 행인들이 반가워하며 몰려들고 있다.

24일(현지 시간) 파리 센강 변 ‘파리 플라주’에 등장한 샤워기 같은 분무기 아래서 사람들이 더위를 식히고 있다. 파리=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24일(현지 시간) 파리 센강 변 ‘파리 플라주’에 등장한 샤워기 같은 분무기 아래서 사람들이 더위를 식히고 있다. 파리=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바캉스 민족’ 프랑스인은 휴가철 여행에 목숨을 걸다시피 한다. 바캉스(vacance)의 라틴어 어원 바카티오(vacatio)가 자유로워짐을 뜻하듯 가급적 먼 곳으로 한 달이든 두 달이든 일상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올해는 달라졌다. 고(高)물가와 폭염에 여행을 포기하거나 가까운 곳에서 짧게 머물다 오는 이들이 많아졌다.
“인플레이션으로 휴가 재설계”
이날 파리 플라주에서 만난 대학생 사샤 씨는 “요즘 물가가 워낙 비싸다 보니 친구들은 여행을 떠나기보다 파리에 남아 있거나 비용을 줄일 수 있는 부모님 댁에서 그냥 쉰다”고 했다. 파리 대학생들이 고물가 속에 허리띠를 졸라매는 ‘짠물 바캉스’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주말 오후 더 화려한 곳을 찾을 법한 청년들도 파리 플라주를 많이 찾았다. 드러누워 일광욕을 즐기거나 행사 기간 임시로 설치된 레스토랑에서 맥주를 마셨다. 파리 플라주뿐만이 아니다. 파리 15구 워터파크 ‘아쿠아불바르’는 이달 들어 주말마다 인산인해다. 해변을 찾을 엄두를 내지 못한 시민들이 도심 물놀이로 아쉬움을 달래고 있다.

프랑스인은 2020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이후 2년여 포기했던 여행을 올해 재개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여행 경비는 줄이고 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이포프에 따르면 올해 여름휴가를 떠날 계획인 프랑스인은 55%로 지난해(47%)보다 늘었다. 그러나 응답자 4분의 1가량은 ‘작년보다 여행 예산을 줄이겠다’고 답했다. 심각하게 치솟고 있는 물가 때문이다.

지난달 프랑스 소비자물가는 전년 동월 대비 5.8% 올라 1985년 1월(6.1%) 이후 37년 만에 가장 높은 상승률을 보였다. 유럽중앙은행(ECB)이 사용하는 지표(HICP)로 환산하면 6.5%다. 프랑스가 유로화를 사용하기 시작한 이래 사상 최고치라고 블룸버그통신은 분석했다.

특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서방의 러시아산 에너지 제재의 여파로 유류비를 비롯한 교통비 부담이 상당하다. 프랑스 일간 르피가로는 물가 압박 속에 휴가를 떠나는 사람을 위해 여행지별 교통비를 이달 초 분석해 보도했다. 이에 따르면 휘발유 차량으로 리옹에서 툴롱까지 378km를 달리려면 예년보다 12.5유로(약 1만6000원)를 더 부담해야 한다. 리옹∼피니스테르, 파리∼리비에라 등은 휘발유값 30유로(약 3만9900원)가 추가로 발생한다.

사회학자인 장 비아르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원(CNRS) 연구국장은 최근 일간 르몽드 인터뷰에서 “코로나19 이후 2년이 지난 지금 사람들은 휴가를 매우 강렬하게 갈망하고 있는데 인플레이션 때문에 휴가를 재설계했다”며 “우리는 덜 먼 곳으로 가서 더 적은 시간을 보내고, 더 조금 소비한다”고 말했다.
빚내서라도 휴가!
파리 시민들은 돈이 들더라도 귀한 휴가에 여행을 꼭 가겠다는 집념을 보였다. 그렇다면 파리지앵은 인플레이션 시대 바캉스를 어떻게 준비하고 있을까. 발 빠른 청년들은 ‘바캉스 예산’을 미리 준비해 뒀다. 파리 플라주에서 만난 모하메드 씨는 “휴가를 떠나면 여러 곳에서 지출을 많이 하게 돼 미리 예산을 확보해 둬야 한다”며 “휴가에 앞서 분야별 지출을 나눠 보고 불필요한 비용은 줄이고 있다”고 노하우를 소개했다.

어떻게든 여행을 가고 말겠다며 빚을 내는 이도 있다. 문화기관에서 일하는 니콜라 씨는 라디오매체 ‘프랑스앵포’ 인터뷰에서 “여행 자금을 마련하려고 3500유로(약 465만 원)를 대출받았다”며 “이번 휴가 비용을 앞으로 4년간 갚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이상하다”고 털어놨다.

돈 쓰기도 부담되는데 더위까지 극성이라 집 가까운 곳에서 휴가를 보내는 ‘스테이케이션(스테이+베케이션·홈캉스)’도 인기다. 파리 여행 스타트업 ‘스테이케이션’은 파리, 보르도, 리옹 거주자에게 거주지 인근 고급 호텔을 소개한다. 이 스타트업은 파리에서 좋은 반응을 얻자 설립 5년 만인 올해 영국 런던까지 진출할 정도로 성장했다.

파리 근처에서 휴가를 보내려는 수요가 몰리자 파리 근교 에어비앤비도 활성화되고 있다. 르몽드는 에어비앤비 통계를 인용해 올 3월 프랑스에서 나온 에어비앤비 광고의 35%가 교외 숙소 광고였으며 이는 5년 전에 비해 8%포인트 오른 것이라고 보도했다.

프랑스보다 물가가 저렴한 유럽 다른 국가를 찾기도 한다. 파리 인근 도시에 사는 기욤 르사주 씨는 숙박비, 식료품비가 더 싼 스페인에 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르사주 씨는 “프랑스에서 여행하긴 너무 비싸서 아예 스페인 남부로 떠날 것”이라며 “그곳에선 파리보다 더 넓고 저렴한 아파트를 빌릴 수 있어 해외의 친척과 함께 머물다 올 예정”이라고 했다.
심화하는 ‘휴가 양극화’
프랑스인의 ‘바캉스 사수’ 노력은 절박해지고 있지만 인플레이션으로 ‘바캉스 양극화’가 심해졌다는 얘기도 나온다. 고소득층은 해외여행을 떠나는 등 휴가에 아낌없이 투자하는데 빚을 내기조차 어려운 저소득층은 휴가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휴가철 이처럼 흉흉해진 민심을 고려한 듯 프랑스 하원은 물가 상승에 고통받는 저소득층을 지원하는 ‘구매력 보호법안’을 22일 통과시켰다. 이 법에 따라 서민 생활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200억 유로(약 27조 원)가 투입될 것으로 추산된다. 기업이 직원에게 지급하는 비과세 보너스는 3배로 늘고 각종 연금과 지원금도 오를 예정이다. 임대료 인상 상한선을 설정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영국과 이탈리아처럼 고유가로 수익이 급증한 에너지기업의 초과이윤에 ‘횡재세(windfall profits tax)’를 부과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관련 법안은 하원을 통과하지 못했다. 다만 정치권과 여론의 물가 억제 압박이 거세지자 프랑스 에너지 대기업 토탈에너지는 9∼11월 주유소 기름값을 L당 0.20유로, 그 이후 연말까지는 0.10유로 내리기로 했다.


조은아 파리 특파원 achim@donga.com


#인플레시대#바캉스#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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