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황인찬]北 심야 열병식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9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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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9일 0시에 정권 수립 73주년 열병식을 진행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 집권 이후 북한 열병식은 크게 달라졌다. 김일성 김정일 시절에는 대내 결집 성격이 커 대개 녹화방송으로 진행됐다. 이에 비해 김정은은 외신 기자를 부르거나 생중계를 하고 본인도 직접 연설에 나서 대외 메시지를 발신하는 기회로 삼고 있다. 비행 쇼, 시가행진 등 각종 화려한 볼거리도 추가하며 판도 키웠다.

▷그러나 이날 열병식에선 관례처럼 꺼내놓던 신형 무기의 공개가 없었다. 김정은이 참석했지만 연설도 없었다. 북한이 영변 플루토늄 원자로를 재가동했지만 미국이 강한 압박을 하지 않았고, 중국 러시아 주도로 유엔 안보리에서 대북 제재 완화가 논의되는 상황 등을 고려해 대외 메시지를 아낀 것일 수 있다. 이번은 김정은 집권 10년 차에 열린 11번째 열병식. 최근 3차례는 모두 심야에 열렸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각각 13회 열병식을 열었는데 모두 낮이었다. 김정은은 선대보다 열병식 횟수를 늘리면서 새로운 형식에 대한 집착을 보이는 것이다.

▷많게는 수만 명이 참가하는 열병식을 한밤에 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통념을 뛰어넘는 시간대 자체로 많은 관심을 끌 수 있다. 주요 무기의 이동 과정을 감추는 데도 유리하다. 화려한 조명으로 열병식 무대는 강조하되 초라한 주위 풍경은 숨길 수 있는 장점은 덤이다. 뇌과학적으로도 밤에는 세로토닌 분비량이 줄고, 멜라토닌 분비가 촉진돼 사람이 한층 감성적으로 변한다고 한다. 대규모 선동 쇼를 펼치기에도 안성맞춤 시간대란 것이다.

▷일찌감치 히틀러는 이런 효과를 알고 있었다. 나치 독일은 베를린 파리저 광장 등에서 횃불이나 전기 조명 등을 활용한 집회를 열었다. 1933년 뉘른베르크 나치당 대회에서 히틀러 측근인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는 152개 방공 조명을 12m 간격으로 하늘로 쏘아 올려 ‘리히트돔(Lichtdom)’을 연출했다. ‘빛의 대성당’이라는 이 퍼포먼스는 20세기 프로파간다의 상징처럼 남았다. 북한은 지난해 심야 열병식에서 인민대학습당을 비롯한 건물들에 비슷한 조명 연출을 했다.

▷평양은 정치적인 연출에 사활을 거는 곳이다. 김일성의 항일유격대 활동을 신격화, 우상화하며 여태껏 김씨 3대가 군림해온 곳이 ‘극장 국가’라 불리는 북한이다. 김정은이 굳이 야밤에 대규모 열병식을 고집하는 것도 선동 효과를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한 극적인 장치일 것이다. 하지만 화려한 무대일수록 조명이 모두 꺼진 뒤 마주하는 차가운 현실은 더 엄혹하다. 북한 주민들에게는 심야 열병식이 그럴 것이다.

황인찬 논설위원 hic@donga.com


#북한#정권 수립 73주년 열병식#생중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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