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송평인]마지막 신문 앞의 긴 줄

송평인 논설위원 입력 2021-06-26 03:00수정 2021-06-26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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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이 1917년 10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임시정부를 전복한 이튿날 내린 첫 번째 조치는 당시 1위 신문인 사회혁명당(SR) 계열 ‘볼랴 나로다’의 폐쇄였다. 이 신문은 다음 날 ‘볼랴’로 이름을 바꿔서 나왔고 편집진이 체포된 이후에는 ‘나로드’로 이름을 바꿔 나왔다. 레닌은 작가 막심 고리키의 신문까지 폐쇄하는 건 주저했으나 그마저도 이듬해 여름 폐쇄하고 말았다. 비판 언론이 사라진 곳에 관영 ‘프라우다’의 세상이 펼쳐졌다.

▷북한 노동신문이 1997년 5월 26일자에 3개면에 걸쳐 ‘대남공작 영웅1호 성시백’을 소개한 적이 있다. 해방 정국에 신사복에 중절모 차림으로 명동 일대를 휘젓고 다녀 ‘명동백작’으로 불린 성시백은 공작자금으로 ‘조선중앙일보’ ‘광명일보’ 등 10여 개 신문을 만들어 선전활동을 했다. 공산주의자들은 혁명 전에는 언론의 자유를 최대한 이용한다. 레닌도 그랬다. 그러나 혁명에 성공하자 돌변해서 언론의 자유를 짓밟았다.

▷중국 ‘런민(人民)일보’도 관영이다. 이때 관영은 정부에 속한다는 의미의 관영이 아니라 당에 속한다는 의미의 관영이다. 공산 국가에서 정부와 구별된 당의 가장 중요한 활동 중 하나가 선전이다. 런민일보와 그 계열인 ‘환추(環球)시보’ 등의 기자는 다 공산당원이다. 지방 신문도 마찬가지다. 공산당원이 아니면 기자가 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의 머릿속에는 통치자를 비판하는 언론(press)이란 개념은 없고 통치자를 선전하는 매체(media)란 개념만 있다.

▷홍콩의 대표적 반중(反中) 신문인 타블로이드판 핑궈(蘋果)일보가 폐간됐다. 핑궈는 사과란 뜻이다. 창립 당시 금지된 과일인 선악과를 생각하며 사과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하니 성역 없는 비판이 이 신문의 사시(社是)나 다름없었던 모양이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이후 많은 홍콩 언론이 중국 자본을 받아들이며 중국 비판을 외면했지만 핑궈일보만은 비판의 각을 세웠다. 하지만 중국이 지난해 10월 통과시킨 홍콩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사주와 편집국장을 체포하고 은행 계좌를 동결하는 상황에 이르자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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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궈일보의 일일 발행 부수는 통상 7만 부였다. 그러나 홍콩 당국이 12일 사주를 연행하고 신문사 압수수색을 실시하자 이후 구독 수요가 치솟아 55만 부까지 팔렸다. 24일 폐간호는 100만 부가 발행됐다. 많은 홍콩 시민들은 가판대에서 마지막 신문을 샀다. 가늘게 오는 빗속에서 누구는 비를 맞으며, 누구는 우산을 쓰고 한 부의 신문을 사기 위해 긴 줄을 선 모습이 마치 소리 없는 자유의 아우성처럼 들려 가슴이 먹먹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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