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박한 환경서 핀 ‘미나리’ 낯선 땅 뿌리내린 이들 응원[광화문에서/손효림]

손효림 문화부 차장 입력 2021-03-01 03:00수정 2021-03-01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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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효림 문화부 차장
“어머니는 다듬고 난 미나리 뿌리를 버리지 않고 예쁜 항아리에 물을 받아 담가두셨지. 그게 다시 잎이 올라와 겨울의 방 안을 연두색으로 생기 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끊어서 먹기도 했다. 알뜰했던 어머니, 아니 그 시절 엄마들은 다 그러셨지. 뿌리의 생명력을 그냥 버리기가 아까웠던 마음이 읽힌다. 창가에 미나리가 돋아나면 겨울에도 봄을 느낄 수 있었지. 그러고는 ‘창밖은 봄’ 같은 작품을 쓰셨을지도 모른다.”

박완서 작가의 맏딸 호원숙 씨가 박 작가의 10주기인 올해 1월 펴낸 에세이 ‘정확하고 완전한 사랑의 기억’에 담긴 내용이다. 부제 ‘엄마 박완서의 부엌’이 보여주듯 부엌과 음식에 얽힌 박 작가와의 추억을 정리했다. 미나리는 박 작가의 일상은 물론이고 작품 세계에도 조용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영화 ‘미나리’에서도 미나리는 강한 생명력을 상징한다. 정이삭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로, 미국 아칸소주로 이민 간 한국인 가족이 애써 기른 농작물은 모두 엉망이 됐지만 아무렇게나 자란 미나리만 살아남는다. 20억 원가량의 소규모 제작비에, 섭씨 40도가 넘는 불볕더위 속에서 촬영한 이 영화 역시 제목처럼 척박한 환경을 딛고 탄생했다. 뜨거운 호평 속에 지금까지 받은 상만 74개나 되는 ‘미나리’의 열풍을 보며 한 가족이 떠올랐다.

2017년 미국 워싱턴주에 사는 70대 한국인 부부의 자택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이들은 40여 년 전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 갔다. 남편은 트럭 운전, 세탁소, 핫도그 가게 등 온갖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아내도 마트에서 계산원으로 일하는 등 지금의 여유로운 삶을 누리기까지 쉼 없이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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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선물로 소설 ‘채식주의자’와 비잔틴 제국의 최후를 그린 역사서 ‘술탄과 황제’를 건넸다. 부부는 책장을 찬찬히 넘기며 “처음 여기 왔을 때 한글로 된 책을 구하기가 정말 어려웠다. 정신없이 사느라 책을 볼 마음의 여유도 없었지만…”이라며 감회에 잠긴 표정으로 말했다. 아내는 “일하느라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게 늘 미안하다”고 했다. 두 아들은 잘 자라 각자 기반을 잡았다. 큰아들은 동생과 주로 지낸 어릴 적 기억을 해맑게 떠올렸다.

“동생과 TV를 실컷 보다가 엄마가 퇴근할 때면 얼른 끄고 공부하는 척했어요. 그런데 TV를 많이 본 걸 엄마가 알아서 깜짝 놀랐어요. TV가 뜨뜻했던 거죠. 그 뒤엔 찬 물수건을 TV에 올린 뒤 치웠는데 그것까지 엄마가 단박에 알아채서 더 놀랐어요.”

깔깔 웃는 큰아들을 바라보는 엄마의 얼굴에는 안쓰러움과 미안함이 뒤섞였다. 거실에 있는 노래방 기기가 눈에 들어왔다. 한국 노래방에 있는 것과 똑같은 노래책에는 옛 가요가 가득했다. 한국 노래를 부르며 향수와 고단함을 달랬을 부부의 모습이 애잔하게 그려졌다.

오늘 골든글로브 수상작을 발표한다.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오른 ‘미나리’의 수상을 응원하면서도 영화는 그 자체로 위로와 공감이라는 선물을 한 아름 건넸다는 생각이 든다. ‘미나리’는 낯선 땅에 뿌리내리기 위해 애쓴 모든 이들에게 바치는 헌사이기에.

손효림 문화부 차장 aryssong@donga.com



#환경#미나리#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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