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엽수에서 배우는 ‘비움’의 지혜[서광원의 자연과 삶]〈32〉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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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요즘 같은 겨울이면 산은 텅 빈다. 하늘을 보기 힘들 정도로 우거졌던 잎들은 간 곳 없고 찬 바람만 휑하다. 살아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나무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도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의 방편이다.

자연은 원래 그런 것 같지만 원래 그런 건 없다. 텅 빈 겨울 산도 마찬가지다. 이런 산은 지구의 긴 역사로 보면 비교적 최근이라고 할 수 있는 중생대 백악기,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1억4000만 년 전에 생겨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속씨식물인 활엽수가 생겨나면서부터다. 그전에는 소나무의 조상인 침엽수의 세상이었던지라 민둥산이 아닌 한 산은 겨울에도 푸르렀다. 하지만 활엽수가 나타나면서 세상의 풍경이 바뀌었다. 이전과 전혀 다른 텅 빈 겨울 산이 나타났다.

생명의 역사에서 새로 출현하는 생명체들은 대체로 기존 생명체들의 단점을 대폭 개선해 나타난다. 요즘 식으로 하면 이전과 다른 새로운 경쟁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활엽수도 마찬가지였다. 활엽수는 특히 추운 겨울을 이겨내기 위해 일년 내내 바늘 모양의 가느다란 잎을 달고 있던 방식을 버렸다. 그 대신 넓고 큰 잎을 선택했다.

하지만 삶의 형태를 바꾸는 건 단순히 겉모양만 바꾼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넓은 잎은 햇빛을 받기에 좋지만 겨울이 문제다. 추위를 더 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얼어 죽을 수도 있다. 활엽수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이들이 찾아낸 건 융통성이었다. 겨울처럼 상황이 좋지 않을 땐 굳이 애쓰며 버티기보다 한발 물러나는, 다시 말해 잎을 다 떨어뜨리고 최소한의 신진대사로 고비를 넘기는 것이다. 그러다 상황이 좋아지면 재빨리 넓은 잎을 펼쳐 무럭무럭 성장하는 모드로 전환한다.

상황에 탄력적으로 대응하는 이 새로운 방식은 대성공이었고 그 덕분에 활엽수는 세상을 자신의 영역으로 만들 수 있었다. 위기에는 거의 모든 걸 버리고 비운 가벼운 몸으로 지내다 좋은 시절이 오면 그에 맞게 성장하는 전략으로 말이다.

언젠가 알토란처럼 탄탄한 회사를 일군 한 사장에게서 뜬금없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사업을 하다 보니 한 번쯤 망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하는 게 아닌가. 농담이 아니었다.

“망하니까 그 복잡한 인간관계가 싹 비워지더군요. 그 덕에 누구를 믿어야 하고 믿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있었어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시원하게 웃었다. 그때 세상을 사는 법을 새롭게 알았다는 듯 말이다. 비움이 더 큰 채움을 만들고 다 잃었는데 더 큰 걸 얻는 아이러니, 삶이란 참 묘하다.

지금은 깊고 깊은 한겨울이지만 겨울은 언젠가 갈 것이고 그러면 봄이 올 것이다. 비웠기에 채울 수 있는 봄이 오면 비움이 어떤 채움을 이뤄내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활엽수#배우#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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