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 괴롭힘, 어디서도 안 된다[현장에서/박종민]

박종민 사회부 기자 입력 2021-01-21 03:00수정 2021-01-2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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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민 사회부 기자
“피부가 그게 뭐냐? 천연두에 걸린 환자 같다.”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사장의 막말. A 씨는 그때마다 숨통이 조여 오는 듯했다. 사장은 “여자는 결혼하면 회사 관둬야지” “이 동네에서 (남녀 통틀어) 네가 덩치가 제일 크다” 등의 말들을 스스럼없이 해댔다. 게다가 주말에도 전화로 업무를 지시하는가 하면, 가짜 영수증 작성 등 불법적인 일까지 시켰다.

“너무 고통스러웠죠. 근데 알아봤더니, 어디 하소연도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더 충격을 받았어요. 직원이 5명이 안 돼서 ‘직장 내 괴롭힘’ 적용도 안 된다고 들었어요. 괜스레 더 억울해지더라고요.”

누군가에겐 너무 극단적인 사례로 비칠 수도 있다. 요즘 회사에서 상사라고 함부로 굴었다간 처벌받는다는 걸 웬만하면 다 안다. 2019년 7월부터 시행한 근로기준법 개정안에 직장 내 괴롭힘 금지 조항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법은 현재 모든 국민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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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표적인 사례가 사업장 규모에 따라 달라지는 적용 범위다. 직원이 5명 미만이면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을 적용할 수 없단 소리다. 국가인권위원회도 지난해 7월 이 점을 지적했다. 인권위는 고용노동부에 “해당 법의 적용 범위를 넓히고 가해자 처벌 조항을 마련하라”고 권고했다. 5명 미만 사업장에 대한 법 적용은 물론이고 가해자 범위를 확대하고 처벌규정도 도입하라는 내용이다.

지난해 시민단체 ‘직장갑질119’가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이런 경향이 여실히 드러난다. 심각한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다고 답한 응답자가 300인 이상 사업장(29.7%)보다 5인 미만 사업장(57.1%)에서 2배 가까이 많았다.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B 씨는 “사장 부부의 ‘갑질’이 너무 심해 항변했더니, 자신들은 떳떳하다는 듯 ‘할 수 있으면 해봐라’는 식으로 나와 더 상처를 받았다”고 전했다.

다행히 고용노동부도 인권위의 권고에 대해 일부 수용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5명 미만 사업장 적용은 중장기적으로 검토하겠으며, 나머지 권고 사항은 현실적 제약이 있어 쉽지 않다는 입장이다. 박지순 고려대 노동대학원장은 “직장 내 괴롭힘 금지는 사업장 규모에 따라서 달리 적용될 것이 아닌 근로자의 기본적 인권을 위한 대원칙”이라며 “행정적 소요만 극복할 수 있다면 근로기준법 시행령에 포함시키는 방법도 고려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가야 할 방향은 바뀔 게 없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어디서도 괴롭힘을 당하지 않아야 한다. 현재 국회에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관련 개정안이 15개 계류돼 있다. 법이 국민을 지켜주지 않으면, 국민도 법을 신뢰하지 못 한다. “영세업체에 다니는 직원들은 우리나라 국민이 아니냐”는 한 근로자의 항변을 허투루 넘겨서는 안 된다.

박종민 사회부 기자 blick@donga.com
#직장 내 괴롭힘#막말#폭력#사내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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