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전쟁’, 맞지만 틀린 말[임용한의 전쟁사]〈400〉

  • 동아일보

1990년 걸프전이 발발했을 때 역사학자들은 전쟁의 원인과 의미를 분석하는 공개 토론회를 열었다. 화두는 온통 자원이었다. 미국은 왜 석유를 노리는가? 강대국은 왜 전쟁을 통해 자원을 확보하려 하는가?

석유는 강력한 전략자원이다. 특정 국가가 이를 독점하거나 악용한다면 세계 경제와 정세를 한순간에 바꿔버릴 수 있다. 그러니 미국이 석유, 더 정확히는 석유 패권을 위해 이라크를 침공했다는 해석은 솔깃하게 들릴 수도 있다. 미국이 석유에 욕심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황금을 찾아 잉카제국을 침공한 것과, 영국이 다이아몬드 광산을 장악하기 위해 남아프리카를 정복한 것을 걸프전과 동일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을까.

인간의 욕망이나 강대국의 횡포라는 말로 보면 비슷해 보일 수 있다. 그렇다면 초등학교 상급생이 하급생의 구슬을 빼앗는 행위와 강대국이 약소국의 광산을 차지하는 행위는 욕심이 원인이고 무력이 수단이라는 점에서 같다. 하지만 그것이 세상과 역사에 미치는 영향은 전혀 다르다. 지식인이라면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중대한 사건을 ‘강자의 탐욕과 횡포’라는 말로 마무리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분석이 아니라 관찰일 뿐이다.

미국이 베네수엘라를 침공하자 “미국은 왜 석유를 노리는가”라는 물음과 그에 대한 설명이 국내외 언론에 도배됐다. 미국이 석유에 관심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를 곧 석유를 강탈하기 위한 침공으로만 정리하는 것 역시 표피적이다.

21세기 국제 질서의 트렌드는 신(新)블록이다. 그 다음에 터져나오는 것은 신블록의 구성 요소인 블록 내부의 유통과 교역 방식, 자본과 자원의 순환 구조, 정치 체제와 이념 등이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갈등, 시위와 내전은 이 블록의 정체성과 내부구조와 관련이 있다. 우리에게도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걸프전#석유#미국#자원패권#이라크침공#강대국#전략자원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트렌드뉴스

트렌드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