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세포[횡설수설/이진영]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1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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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여성 헨리에타 랙스는 미국 존스홉킨스대 병원에서 자궁경부암 진단을 받았다. 방사선 치료로 잠시 사라졌던 암세포는 다시 급격히 퍼졌고 1951년 31세로 숨졌다. 그런데 랙스를 죽인 악성종양의 비상한 증식 능력이 인류에겐 축복이 됐다. 그의 자궁경부에서 떼어낸 암세포가 정상세포보다 20배 빠른 속도로 무한 증식하며 전 세계 실험실로 퍼져나가 생명공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이다.

▷배양에 성공한 최초의 인간 세포 이름은 헬라(Hela). 헨리에타 랙스의 앞 철자 두 개씩을 따서 지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세포 분열을 이어가고 있는 헬라 세포 덕분에 항암 치료제가 나왔고 시험관 아기가 태어났으며 유전자 지도도 제작됐다. 최초의 소아마비 백신도 헬라 세포 덕분이다. 당시 백신 안전성 검증엔 원숭이 세포가 활용됐는데 비싸고 구하기도 어려웠다. 헬라 세포는 싼값에 수조 개 단위로 생산돼 소아마비 퇴치에 큰 공을 세웠다.

▷미국 하워드 휴스 의학연구소는 최근 대형 연구기관으로는 처음으로 헬라 세포를 사용한 대가로 헨리에타 랙스 재단에 수십만 달러의 기부금을 내기로 했다. 랙스가 사망한 지 70년이 지난 후에야 보상이 이뤄진 배경엔 과학계의 흑역사가 있다. 헬라 세포는 기증자의 동의 없이 채취되고 널리 사용된 첫 사례다. 존스홉킨스대 병원은 치료하고 남은 세포를 배양해 과학자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했고, 바이오 회사들은 이를 대량 생산해 떼돈을 벌었다. 이를 까맣게 몰랐던 유족은 의료보험이 없어 중병에도 치료를 못 받는 비참한 생활을 이어갔다.

▷랙스가 흑인이었기 때문에 헬라 세포의 업적과 수익에서 오랫동안 소외됐다는 비판도 나온다. 미국에선 흑인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 간간이 있었다. 1972년엔 매독 연구를 위해 흑인 매독 환자들을 항생제 처방 없이 40년간 관찰해온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하워드 휴스 연구소의 보상은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는 운동으로 과학계의 인종차별 역사 청산을 요구하는 분위기에서 이뤄진 것이다.

▷지금은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신체 조직을 채취하거나 이를 연구 목적으로 활용할 때 개인의 동의를 받도록 한다. 건강검진 자료 수집과 연구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구체적인 규제의 강도는 나라마다 다르고, 과학 발전을 위해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는 현실론과 생명 윤리는 양보할 수 없다는 원칙론이 팽팽하게 맞선다. 더 건강한 삶의 권리를 누리는 만큼 공익을 위해 어느 선까지 신체 정보를 제공해야 하는가는 첨예한 논쟁거리다. 살아 있었으면 100세가 됐을 랙스가 타의로 남긴 불멸의 세포는 묵직한 생명과학 윤리 문제를 던진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자궁경부암#헬라 세포#무한 증식 세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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