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사자와 팬케이크, 스가 장관의 두 얼굴[광화문에서/박형준]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9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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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준 도쿄 특파원
박형준 도쿄 특파원
지난해 6월 일본 오사카에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열렸을 때다. 강제징용 문제로 한일 관계가 얼어붙어 있었기에 양국 정상이 만나 대화를 나눌지가 언론의 큰 관심사였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만남은 개막 환영식 때 8초간 악수를 나눈 게 다였다.

오사카 현장에서 한 일본 기자가 “만약 문 대통령이 악수하며 ‘오늘 저녁에 시간 됩니까. 새벽이라도 좋으니 만납시다’라고 갑자기 말했다면 어땠을까. 일본인은 예상치 못한 상황 대응에 약하다. 아마 아베 총리가 얼떨결에 ‘예스’라고 답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위 다른 일본 기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가정의 연속이지만, 만약 당시 악수한 상대가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이었다면 어땠을까. 기자는 ‘예스’란 답을 하지 않았을 거라고 본다. 스가 장관은 7년 8개월 동안 행정부 2인자로서 위기관리 역할을 도맡았다. 평일 두 차례 열리는 그의 기자회견에서 당황해하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꼼꼼한 관리형 참모의 대명사다.

그는 아키타현의 농가 출신으로 학연, 혈연, 지연에 기댈 수 없었기에 ‘실력’으로 승부를 걸었다. 현재 72세의 나이에도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몸 풀기와 복근 운동 100회를 한 뒤 신문을 읽는다고 한다. 술과 담배는 하지 않는다.

그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자주 인용하며 주위에 “때론 미움 받는 용기가 필요하다”, “리더가 마냥 좋은 사람이어선 안 된다”고 말한다. 일본 관가에선 ‘저승사자’로 통한다. 스가 장관이 추진하는 정책을 제대로 뒷받침하지 못하면 그 길로 끝이기 때문이다. 실제 고향에 기부금을 내는 ‘고향 납세’를 둘러싸고 기부 한도액을 높이고자 하는 스가 장관의 의견에 반대한 국장급 공무원이 출세 코스에서 벗어났다(아사히신문 4일자 보도). 정반대의 모습도 있다. 달달한 간식, 특히 팬케이크를 좋아한다. 도쿄 아자부주반에 있는 삼계탕집에도 자주 간다. 한국에서 특파원을 경험한 일본 기자와 식사할 때는 긍정적 한국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초당파 의원 모임인 일한의원연맹에도 이름을 올려놨다.

그런 스가 장관이 14일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당선되고, 16일 임시국회에서 총리로 지명될 게 확실시된다. 스가 장관은 2일 총재 선거 출마 선언 후 한일 관계에 대해 “(강제징용 문제에서 한국은) 국제법 위반을 시정하라”는 기존 정부의 공식 입장만 반복하고 있어 향후 한일 관계 개선은 쉽지 않아 보인다.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갖춰야 할 통치술로 급변 상황을 적시에 파악하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도 강조했다. 스가 장관도 외교 분야에서 실리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2014년 아베 정권이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수정하려 했을 때, 스가 장관은 한국 미국 등의 반대를 고려해 ‘유지’ 결정을 내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문 대통령이 올해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밝혔듯 ‘언제든지 일본 정부와 마주 앉아’ 대화를 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스가 장관이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믿을 만한 한국 인물로 꼽고 있는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 서훈 국가안보실장 등이 나서 대화 물꼬를 트는 게 관계 개선의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박형준 도쿄 특파원 lovesong@donga.com
#스가 요시히데#군주론#통치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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