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정부’가 말하지 않는 것[오늘과 내일/고기정]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5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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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가 국가의 존재 다시 일깨웠지만 큰 정부의 비효율-시장 위축도 같이 봐야

고기정 경제부장
고기정 경제부장
몇 년 전 베이징에서 중국의 의료 실태를 주제로 한 토론을 참관한 적이 있었다.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가장 먼저 무너져 내린 게 의료체계다. 사회자가 방청객들에게 물었다. “여러분 나라에선 감기 같은 질병으로 병원에 가면 얼마 정도 드느냐.” 한 한국인 참석자가 인민폐로 50위안(약 8600원) 정도면 된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한 수 가르치듯 한국 건강보험 제도의 우수성을 소개했다. 국가적 우월감이 마구 솟구쳐 오르던 순간, 뒤이어 마이크를 건네받은 영국인 유학생 부부가 한국인들을 머쓱하게 했다. “우리나라에선 다 무료인데요?”

코로나19 이후 바뀌고 있는 사회적 가치관 중 하나가 국가의 역할이다. 작은 정부에서 큰 정부로, 시장에서 국가로 급속하게 패러다임이 옮겨 가는 듯하다. 이런 변화를 이끌어 내고 있는 핵심 논거는 공공의료 체계다. 얼마 전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저명 경제학자의 공공의료 관련 주장을 놓고 갑론을박이 있었다. 글의 요지는 이렇다.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이 코로나19에 무릎을 꿇은 건 신자유주의의 교리를 받들어 공공의료 예산을 마구잡이로 삭감한 때문이고, 한국에서도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이를 흉내 내려는 시도를 했지만 다행히 무산됐으며, 그 덕분에 세계적으로 우수한 우리의 공공의료 체계가 감염병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새겨들을 말이긴 하나 이를 반박할 팩트 또한 차고 넘친다. 한국의 총 의료비 중 공공의료비 비중은 60%를 밑돈다.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위권이다. 네덜란드, 덴마크 같은 나라가 80% 이상으로 상위권에 속한다. 또 한국의 공공의료 시설 비중은 2015년 기준 5.8%로 OECD 회원국 평균 53%에 턱없이 못 미치는 반면 민간의료의 천국이라는 미국도 23%나 된다. 한국의 공공의료를 흔히 건보체계와 연결짓지만 엄밀히 말해 이는 등치되는 성격이 아니다. 건보료는 개인 가입자와 기업이 나눠 내고 있고, 국고 지원분이 있긴 하지만 2007년 이후 정부가 미납한 금액이 24조 원에 이르며 건보의 보장률은 아직까지도 60%대 초반에 그치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의 의료체계가 좋아 보이는 건 모든 병·의원을 건보체계 안에 묶어 뒀음에도 민간의료의 역량과 서비스가 뛰어나서다.

코로나19가 국가의 존재를 일깨워준 건 맞다. 대공황이 미국을 휩쓸고 간 1941년 루스벨트 대통령이 ‘궁핍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want)’를 주장하며 큰 정부를 추구했다가 40년 뒤인 1981년 레이건 대통령이 ‘정부가 바로 문제(government is the problem)’라며 작은 정부로 흐름을 바꿔놨으니 이번에 다시 40년 만에 과거의 국가가 귀환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최고의 공공의료 체계를 갖췄다는 유럽이 코로나19에 백기를 든 반면에 공공의료든 민간의료든 할 것 없이 그 양적 수준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동남아 국가들은 선방하고 있는 걸 보면 “정부가 모든 문제의 해결사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레이건의 말이 완전히 틀렸다고 하기도 어렵다.

공공의료 선진국이라는 영국에서 지난달 돌아온 지인의 말이다. “국영병원에 가려면 예약한 뒤 길게는 2주를 기다려야 한다. 그마저도 예약을 할라치면―과장을 좀 보태자면―아침에 전화기를 붙잡고 한 시간 동안 100번은 걸어야 연결이 된다.” 병원비가 무료라던 그 영국인 부부는 이 말까지 했어야 했다. 요즘 국가의 귀환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동안 익히 봐왔던 큰 정부의 비효율과 시장의 위축을 알고도 모른 척하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고기정 경제부장 koh@donga.com
#코로나19#공공의료비#국영병원#병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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