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이런 해는 없었다[동아광장/이인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2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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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연금 근로장려금 등 지출 늘려 소득불평등 역대 최저치 나타냈지만
영세 자영업자 업황 악화는 여전
중산층 저소득층 富 축적 위한 자산보유정책의 효과성 높여야

이인실 객원논설위원·서강대 경제대학원 교수
이인실 객원논설위원·서강대 경제대학원 교수
지금까지 이런 해는 없었다. 올해 영화산업의 결과를 놓고 영화비평 전문가들이 하는 말이다. 관람 누적관객 1000만 명 이상 동원한 영화가 무려 5편이다. 1919년 한국 최초 영화라고 할 수 있는 ‘의리적 구토’가 만들어진 이후 한국 영화사 100년을 맞이한 해에 이룬 쾌거라 뜻깊다. 스크린 쿼터제 사수를 위해 영화인들이 삭발하던 때를 회상해보면 우리 영화산업의 저력은 그야말로 일취월장했다. 1000만 명 영화 중 하나인 ‘기생충’은 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고 저명한 영화평론가에 의해 ‘2019년 최고의 영화’ 목록에도 올랐다. 한국 영화는 단계적 규제개혁 이후 개방의 문이 넓어지면서 문화식민지 우려를 불식하고 국제경쟁력을 차근차근 쌓아가며 매년 큰 성과를 내왔다. 하지만 마주해야만 하는 불편한 진실도 있다. 올해 관객점유율 1위를 해외 배급사에 빼앗겼고 스크린 독과점 문제도 여전하며 대박 영화가 기록을 경신하는 가운데 중박 영화가 사라졌다.

한국 경제도 비슷한 양상이다. 2019년 가계금융복지조사에 의하면 소득불평등을 나타내는 척도인 균등화처분가능소득 기준 지니계수는 2018년 0.345로 2011년 통계 집계 이후 최저치이며, 소득 5분위 배율 역시 6.54배로 통계 작성 이후 최저치다. 소득불평등이 대폭 개선된 해란 이야기다. 미래의 빚이 느는 것을 감수하며 기초연금, 근로장려금, 각종 수당 등 공적이전소득 지출을 늘려온 덕에 나타난 뜻깊은 결과다.

하지만 내년도 경제정책방향을 발표하면서 정책노력 의지를 담았다며 2.4%라는 장밋빛 성장률을 전망한 정부는 불평등의 또 다른 불편한 진실도 직시해야 한다. 같은 조사에 의하면 자산과 부채를 감안한 순자산 지니계수는 0.597로, 전년 대비 0.009 증가했다. 상위 20%의 순자산은 전년 대비 3.5% 늘어난 반면에 하위 20%의 순자산은 3.1%나 줄었다. 특히 상위 10% 분위만 자산점유율이 늘었고, 모든 하위 분위에서 점유율은 늘지 못했다. 자산 불평등이 역대 최대 수준으로 벌어졌다. 물론 이는 자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보유 부동산 등 자산가격 변화 때문이다. 투기를 잡겠다며 민간 분양가상한제를 도입해 부동산 공급을 얼어붙게 하더니 설상가상으로 교육부까지 자사고, 특목고 폐지 정책을 강행하면서 학원 인프라가 많은 지역 부동산 가격을 천정부지로 올려놓은 정책과 비슷한 맥락의 정책을 이어온 탓이다.

불편한 진실은 또 있다. 주로 영세한 서민업종인 도·소매, 숙박·음식점 업종의 사정이 악화일로에 있다. 올해 3분기 사업소득이 지난해보다 4.9% 감소했고, 대출 잔액은 9월 말 220조 원으로 전년 동월 대비 12.1%나 늘어 2008년 이후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10월 기준으로 전년 동월 대비 고용원 있는 소상공인은 8.7% 감소한 반면에 고용원 없는 소상공인은 2.5% 늘었다. 내수침체가 이어진 데다 최저임금의 여파로 소상공인들이 직원 수를 줄이며 애쓰는데도 빚만 늘고 있는 것이다. 이런데도 고용 상황이 양과 질 모두 뚜렷하게 개선되고 있고 우리 경제가 어려움 속에서도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하니 국민여론이 화가 날 수밖에 없다.

그동안 한국 경제는 외적인 충격에도 인적·물적 자원을 신속히 동원하고 자원을 적절히 배분해 생산성을 높이는 데 있어 다른 어느 국가보다 앞서 나갔다. 이런 다이내믹 코리아가 최근에는 글로벌 평균 추이조차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소모성 복지지출 확대로는 불평등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 취약한 부문에 사회간접자본과 교육 투자를 늘려 중산층과 저소득층이 자산 형성을 통해 부를 축적할 수 있도록 자산보유정책의 효과성과 형평성을 높여야 한다.

중국이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부상하며 시작된 격동의 2010년대가 끝나고 각 국가가 각자도생해야 하는 초불확실성과 혼돈의 2020년대가 시작된다. 경제가 튼튼하고 정부가 유능하며 국민들이 힘을 모아 지지하는 나라가 살아남는다. 어렵고 불안한 시대에 국민을 힘내게 하는 파이팅 정신의 길로 이끌어야 한다. 불평등도가 높아지면 경제정책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효과적으로 결집시키기 어렵다. 영화계처럼 지금까지 이런 해는 없었다는 현실을 직시하자. 대박 영화도 좋지만 중박 영화가 많이 나오는 게 더 좋다.
 
이인실 객원논설위원·서강대 경제대학원 교수
#한국 영화사 100년#가계금융복지조사#소득불평등#경제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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