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의회[횡설수설/이진구]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9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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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하원 회의장 바닥에는 마주 보고 앉은 여야 앞자리 앞에 각각 붉은색 ‘검선(劍線·Sword line)’이 그어져 있다. 과거 토론이 격해져 칼싸움으로 번지는 경우가 많아 이를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 검선을 사이에 두고 100마리의 침팬지가 앉아 상대 쪽을 노려보고 있는 그림이 다음 달 런던 소더비 경매에 나온다. ‘얼굴 없는 예술가’ 뱅크시의 작품인 ‘위임된 의회(Devolved Parliament)’인데 200만 파운드(약 30억 원) 이상의 가격에 팔릴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의회 민주주의의 산실’로 불리는 영국 의회(하원)는 무척 점잖고 예의바를 것 같지만 실제는 많이 다르다. 발언자 말이 안 들릴 정도로 야유를 보내는 것은 물론이고, 답변하는 총리가 주머니에 손을 넣거나, 삐딱하게 서서 말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 지난해 말 제러미 코빈 노동당 대표가 당시 테리사 메이 총리를 향해 ‘멍청한 여자’라고 속삭이는 장면이 보도됐는데, 사과를 요구하는 정도로 그쳤다.

▷폭언이라면 현 보리스 존슨 총리를 뺄 수 없다. 그는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에 반대하는 코빈 노동당 대표에게 ‘염소로 표백된 닭’ ‘개똥’이라고 했는데, 거짓말쟁이, 호모 등은 평범한 축에 속할 정도다. 지난해 외교장관 시절에는 같은 당 메이 총리의 브렉시트 협상안에 대해 ‘분칠한 똥’이라며 창의적인 욕까지 만들어냈다.

▷750년 전통의 영국 의회가 ‘최악의, 최후의 정치’로 가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총리의 막말도 문제지만, 그의 역대급 막장 정치 탓이다. 그는 야당 입을 막기 위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앞세워 의회를 정회시켰고, 무려 21명의 같은 당 의원을 노딜 브렉시트 방지법에 찬성했다는 이유로 출당시켰다. 그의 친동생인 조 존슨 기업부 부장관에 이어 앰버 러드 고용연금부 장관도 이런 행태를 보다 못해 사임했다.

▷토론은 격렬하지만 영국 의회는 국가 중대사에서는 서로 화합하는 전통을 지켜왔다. 특히 여야가 합심해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자유로운 토론과 합의로 의회를 운영하는 전통이 깊어졌는데 최근 몇 주간 그런 전통과 문화가 모두 깨지는 경험을 하고 있다. 9일 사퇴를 선언한 존 버커우 하원의장은 230년 만에 귀족 작위를 못 받는 하원의장이 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보수당이 버커우가 브렉시트에 반대했다며 귀족 지위를 주는 전통을 없애는 방안을 추진 중이기 때문이다. 가장 오래된 의회민주주의 국가에서 ‘포퓰리즘이 어떻게 의회민주주의를 흔드는지 보여주는 실험장이 됐다’는 자조가 나오고 있다.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영국 의회#뱅크시#위임된 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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