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상사법원이 23일 ‘한국 정부가 미국계 사모펀드 엘리엇에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관련 1600억 원을 배상해야 한다’는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 판정 결과를 취소한 핵심 이유는 합병 당시 찬성표를 던졌던 국민연금을 한국 정부 기관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2023년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 중재판정부는 박근혜 정부 청와대와 보건복지부, 국민연금의 부당한 찬성 의결권 행사로 삼성물산 주주였던 엘리엇이 손해를 봤다면서 한국 정부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하지만 이 판정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심리해 온 영국 상사법원은 “국민연금은 정부기관이 아니다”라는 한국 정부의 논리를 받아들여 기존 중재 판정을 뒤집었다.
정부 안팎에선 “국민연금이 한국 정부 기관이 아니라는 국제법 판례를 만든 것으로 국민연금을 둘러싼 각종 사모펀드의 국제투자분쟁을 미리 방지하는 성과를 거둔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조아라 법무부 국제투자분쟁과장이 24일 경기 과천시 법무부 청사에서 미국계 사모펀드 엘리엇을 상대로 승소한 판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법무부 제공
● 英 법원, 판결문서 “투자 공적 중요성 커도 정부 권한 행사한 건 아냐”
24일 동아일보가 확인한 75페이지 분량 판결문에서 영국 상사법원의 폭스턴 판사는 국민연금에 대해 “사실상(de facto) 국가기관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국민연금이 보건복지부의 감독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한국의 여러 법령에 따르면 중앙정부나 지방정부 기관으로 볼 만한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법원은 또 국민연금이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찬성 의결권을 행사한 것에 대해서도 “투자 수익을 추구하기 위한 상업적 활동이고, 규제권이나 주권적 권한을 행사한 것이 아니다”라며 정부의 권한을 행사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밝혔다. 법원은 “투자 규모나 공적 중요성이 크다는 이유만으로 이를 정부 권한을 행사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했다.
다만 법원은 당시 청와대와 보건복지부 공직자들이 국민연금 측에 ‘합병 찬성’ 의중을 전달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인정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5년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국민연금 의결권을 잘 챙기라”고 지시한 점, 당시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이 합병 안건을 외부 전문가위원회에 회부하지 않도록 한 점 등이 판단 근거가 됐다. 법원은 “대한민국의 국가기관인 대통령, 청와대, 보건복지부 장관 등이 국민연금 구성원들에게 합병 찬성 지시나 지침이 전달되도록 한 것을 인정한다”며 “국민연금 투자위원회가 독립적 결정을 내리지 못하도록 하고 주어진 지침에 따라 표결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 정부 “‘큰 손 연기금’ 상대 줄소송 가능성 차단한 것”
영국 상사법원의 이번 판결이 확정되면 엘리엇이 낸 국제투자분쟁 소송은 다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 중재판정부에서 심리된다. 중재판정부가 한국 정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핵심 근거였던 ‘국민연금이라는 정부기관의 부당한 의결권 행사’라는 쟁점은 제외된다. 당시 청와대와 보건복지부의 부당한 개입으로 삼성물산 주주였던 엘리엇이 손해를 봤는지 여부가 새로운 쟁점으로 다뤄지게 된다. 이를 두고 정부 안팎에선 “삼성물산 합병으로 손해를 봤다며 국제투자분쟁 소송을 내 746억 원을 배상받았던 미국계 헤지펀드 메이슨 캐피탈의 중재 소송과 쟁점이 비슷해지는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엘리엇은 이번 판결에 대해 법원에 항소 허가를 신청할 수 있지만 실익이 없을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엘리엇 측이 항소 허가를 신청하더라도 이번 판결을 내린 1심 법원의 폭스톤 판사가 직접 항소를 허가할지를 결정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엘리엇은 소송비용 등이 확정된 뒤 3주 안에 항소를 신청할 수 있다.
정부는 이번 판결에 대해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를 비롯한 투자 활동이 국제투자분쟁 소송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법리가 확립된 것”이라고 의의를 밝혔다. 1800조 원 상당의 노후자금을 굴리는 ‘큰 손 연기금’인 국민연금에 대해 영국 법원이 “한국 국가기관”이라고 판결했을 경우 우리 기업에 투자한 해외 사모펀드들이 잇따라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를 문제 삼으며 국제 중재를 낼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 판결로 이런 가능성이 차단됐다는 것이다. 조아라 법무부 국제투자분쟁과장은 “국민 대다수의 노후 자금인 국민연금의 독립성과 자율성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았고 기금이 안전하게 운용될 수 있는 기틀도 마련됐다”고 밝혔다.
● 각하→항소 끝에 승소
이에 앞서 엘리엇은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승인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국민연금을 동원해 부당하게 개입해 7억7000만 달러(약 1조1270억 원)의 손해를 입었다며 2018년 국제투자분쟁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는 지난해 6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622억 원과 지연 이자·법률 비용 등 총 1600억 원을 지급하라”고 판정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여기에 불복해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중재 판정을 취소해달라”는 추가 소송을 냈다.
2024년 8월 1심인 영국 상사법원은 한국 정부의 청구를 각하했지만, 영국 항소심은 지난해 7월 “한국 정부 주장은 적법하다”며 한국 정부 측 승소 판결을 내린 뒤 사건을 1심 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이후 사건을 돌려받은 영국 법원이 PCA 중재판정에 취소 사유가 있는지를 살펴본 뒤 23일 한국 정부 승소로 판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