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임우선]사교육 잡겠다던 정부 정책… 어떻게 사교육 진흥책 됐나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2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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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우선 정책사회부 기자
임우선 정책사회부 기자
쓰기 싫다 하지만 끝도 없이 쓴다. 잡겠다고 하지만 갈수록 멀어진다. 바로 한국의 ‘사교육비’다. 다음 달이면 지난 한 해 한국의 초중고교 사교육비가 집계돼 발표될 것이다. 교육부와 통계청은 매년 3월 15일 전후로 국내 초중고교 사교육비 통계를 발표해 왔다.

올해 수치는 어떨까. 개인적으로는 사상 최대치를 찍으리라 본다. 2017년 이후 현 정부가 내놓은 교육 정책 대다수가 의도와는 달리 사교육계를 번창시키는 ‘단비’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초등부터 보자. 가장 큰 헛발질은 ‘초등 1, 2학년 방과 후 영어’ 금지였다. 어린이집·유치원에서 해온 영어를 갑자기 초등학교에서 못 하게 하니, 학부모들은 황당함과 불안감을 토로하며 학원을 찾았다. 많은 학부모가 ‘다른 건 몰라도 회화는 좀 됐으면’ 하고 바라는 상황에서, 학원들은 ‘쏟아지는 고객들’에 소리 없이 환호했다.

현장을 둘러보면 초등 저학년 반을 20∼30%씩 증설한 학원이 적지 않았다. 학부모들은 학교에선 10만 원이면 됐을 수업을 30만 원 넘게 내고 다녔다. 저소득층 아이들은 영어 학습의 기회에서 원천 배제됐다.

이 정책의 더 큰 문제는 비단 영어에만 영향을 준 게 아니란 점이다. 초등 저학년 학부모들은 중고교에 비해 국영수 사교육에 대한 관심이 낮은 편이다. 하지만 이 정책을 계기로 많은 학부모가 일찍이 ‘학원의 맛’을 보게 됐다.

학원들은 학교 수업과 달리 ‘레벨 테스트’를 보고, 분반을 한다. 중간중간 또다시 테스트를 봐 끊임없이 경쟁시켜 나간다. 여기서 학부모들은 그간 몰랐던 ‘자녀의 위치’를 알게 된다. 내 아이가 A, B, C를 할 때 다른 아이는 영어로 일기를 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간 ‘이 정도면 괜찮아’라고 생각했던 것도 학원에 들어서는 순간 ‘문제적 상황’이 된다. 현장을 보면 영어에서 느낀 이런 ‘위기감’이 수학 등 다른 과목 사교육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경우가 많았다. 학원에 갈 생각도 없던 많은 학부모를 정부가 나서 ‘사교육의 러닝머신’ 위에 올려 태운 셈이다. 올라가긴 쉬워도 내려오긴 힘든, 그 무한 트랙 위에 말이다.

현 정부가 열심인 혁신학교나 중학교 자유학년제도 사교육 활성화에 기여한 측면이 있다. 혁신학교의 취지와 교육 방식에 공감하는 학부모들조차도 ‘그래도 혁신 다니면 공부는 엄마가 따로 챙겨야지’라고 말하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자유학년제 역시 교과수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다 보니 더욱 학원을 찾는 양상이 나타난다. 취재 중 만난 한 중학생 학부모 말마따나 “학교에서는 ‘죙일’ 놀고 하교 후에 ‘열공’” 하는 희한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현장에서 보기엔 현 정부의 외고·자사고 폐지 정책도 사교육 경감에 별 영향을 못 줬다. 오히려 외고·자사고를 준비하던 학생들마저 ‘마지막 남은 성지’인 영재학교·과학고 입시를 노리면서 일부 지역의 사교육은 초경쟁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영재학교·과학고는 모든 종류의 고교 입시 가운데 가장 극단적 강도의 수학·과학 선행을 요구한다. 사교육 비용도 월 수백만 원에 이르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이렇게 해 두면 설령 일반고 가도 내신 1등급 쉽게 따죠. 남들 내신 공부할 시간에 비(非)교과 스펙 만들고요.” 강남 학부모의 이 말은 현재 대한민국 고교에서 유효한 입시전략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설상가상으로 지난해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는 ‘역대급 국어 문제’도 나왔다. 한 사교육업체 회장은 사석에서 “교육부 안에 사교육 진흥을 위한 비밀조직이 있는 것 같다”고 개탄했다. 이상은 높은데 구현 능력이 부족한, 안쓰러운 교육 정책의 현주소다.

임우선 정책사회부 기자 imsun@donga.com
#사교육#자유학년제#혁신학교#수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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