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조종묵]때로는 과잉대응이 필요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0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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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묵 소방청장
조종묵 소방청장
코뿔소는 거구이지만 초식이라서 근본적으로 공격적이지 않다. 하지만 위험한 상황에 놓이면 본능적으로 달려드는 행동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코뿔소의 온순함에 방심하고 함부로 행동을 했다가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지만 소홀히 하거나 간과해서 발생할 수 있는 위기를 ‘회색 코뿔소(grey rhino)’라고 부른다.

우리가 경험하는 대형재난은 지진과 같은 천재지변도 있지만 상당수가 수차례의 위험신호가 있었음에도 대비하지 않은 결과인 경우가 적지 않다. 비상구 앞을 물건 보관 창고처럼 사용하다가 화재 시 통로가 폐쇄되어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하는 상황이 한 예이다.

9·11테러 당시 글로벌 투자은행인 ‘모건스탠리의 기적’을 잘 알고 있다. 보안책임자 릭 레스콜라가 1분 1초가 아깝다고 하는 회사의 특성을 무릅쓰고 매년 4회씩 8년간이나 전 직원을 대상으로 비상대피 훈련을 반복했기에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2000명이 넘는 생명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레스콜라는 1988년 12월 팬암 항공기 폭파 테러사건을 계기로 경계와 대비 강화가 절실하다고 주장하고 이를 강력하게 실천에 옮겼다고 한다.

‘이상지계(履霜之戒)’라는 말이 있다. 서리가 내리는 것은 얼음이 얼 징조이므로 미리 대비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조선통신사 일행으로 일본에 간 문인 조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술 마신 잔을 깨버리고 어린아이에게 장난을 치는 거친 행동을 보고 일본의 침략을 예견했다. 조헌은 왜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했으나 무시를 당하자 낙향해 왜란에 대비하고 의병장이 돼 목숨을 바쳤다.

재난을 막으려면 철저한 대비와 예방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설마 하는 마음에 대비를 미루다가 재난이 발생하면 책임을 회피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경우도 많이 봐 왔다. 왜적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는 의견을 무시하고 궤변을 폈던 대신들이 막상 전쟁이 나자 뿔뿔이 흩어져 목숨 보전에 급급했던 것이 생각난다. 그러나 이것은 서로에게 상처가 되고 화합을 저해할 뿐이다.

‘모기 보고 칼 빼기’라는 속담이 있다. 작은 일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의 엄청난 대책을 세운다는 뜻이다. 효율적인 대처가 아님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문구지만 재난 대비에는 훌륭한 경구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사실 안전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은 일면 귀찮고 번거로우며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기껏 모기 한 마리에 칼을 빼드는 것이 현실적이지는 못하겠지만 작은 것이라도 위험 요인을 제거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효율성으로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11월 9일은 56주년을 맞는 ‘소방의 날’이다. 소방의 날이 시작된 출발점은 ‘화재 예방의 날’이었다. 소방의 날이 단순히 기념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뒤를 돌아보고 새로운 다짐과 실천을 시작하는 날이 되기를 기대한다.
 
조종묵 소방청장
#회색 코뿔소#대형재난#이상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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