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이헌재]文대통령의 시구는 몇 점?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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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재 스포츠부 기자
이헌재 스포츠부 기자
동네 야구 좀 했다는 말이 허언이 아니었다. 글러브 낀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와인드업 동작도 그럴듯했다. 공은 원 바운드로 포수 미트에 들어왔지만 일반인치고는 수준급이었다. 25일 광주 기아챔피언스필드에서 열린 두산-KIA의 KBO리그 한국시리즈 1차전에 깜짝 등장한 문재인 대통령의 시구는 여러모로 인상적이었다.

먼저 스포츠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느껴졌다. 야구를 잘 모르는 정치인이나 연예인 중에는 간혹 구두를 신고 마운드에 오르는 경우가 있다. 메이저리그 팀의 그라운드 키퍼였다면 눈에 불을 켜고 막을 일이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잔디에 해를 주지 않는 편안한 운동화를 신었다.

마이크를 잡느라 시간을 지체하지도 않았다. 군더더기 동작 없이 공을 던진 뒤 곧장 마운드를 내려왔다. KIA 선수들과 스스럼없이 악수하는 모습도 보기 좋았다. 예전에 야구장을 유세장으로 착각한 한 정치인은 시구에 앞서 일장연설을 한 적이 있다. 시구 후엔 차렷 자세로 선 선수 및 관계자들과 느릿느릿 악수를 했다. 자기가 주인공이 되려 했으니 관중석에서 야유가 쏟아진 것은 당연했다. 이번 시구를 지켜본 관중들은 열화와 같은 박수로 문 대통령을 환영했고, 문 대통령은 ‘개념 시구’로 화답했다.


하지만 까칠한 야구 기자의 눈으로 볼 때 만점을 주긴 어렵다. 역대 모든 정치인 시구를 통틀어 최고의 시구이긴 했지만 100점에는 2%가 모자랐다.

가장 큰 아쉬움은 문 대통령이 야구팬으로서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야구팬이라면 누구나 응원 팀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경남고를 나온 문 대통령은 롯데 팬으로 알려져 있다. 롯데의 전설적인 투수였던 고 최동원이 1988년 프로야구선수협의회 결성을 추진할 때 법률 자문을 맡은 인연도 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아직까지 롯데 팬임을 스스로 밝힌 적이 없다. 문 대통령은 이날 국가대표 점퍼를 입었다. 정치적인 고려가 더 강했던 게 아닌가 싶다.

야구광으로 유명한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시카고 화이트삭스 팬임을 자랑스럽게 드러냈다. 2009년 메이저리그 올스타전 시구자로 나섰을 때 화이트삭스 점퍼를 입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이듬해 4월에는 워싱턴과 필라델피아의 메이저리그 개막전에서 시구를 했는데 당시에는 홈팀 워싱턴의 빨간색 유니폼을 입었다. 그 대신 머리에는 화이트삭스 모자를 썼다. 그는 이에 대해 “시카고가 나의 뿌리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오바마는 젊은 시절 시카고에서 시민운동가로 활동했다.

또 하나는 문 대통령이 경기 도중 경기장을 떠났다는 점이다. 시간을 초 단위로 쓸 만큼 바쁜 대통령이기에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한국시리즈는 야구팬이라면 절대 놓칠 수 없는 하이라이트이다. 경기를 직접 보고 싶어도 표를 못 구해 발을 동동 구르는 팬들이 부지기수다. 1차전부터 7차전까지 모든 표가 이미 매진됐다. 보통 야구팬처럼 끝까지 자리를 지켰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어쩌면 우리 사회가 아직 특정 팀을 응원하는 대통령을 용납하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대통령이 여유롭게 야구 관전을 하는 걸 마뜩잖은 눈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탈한 문 대통령이라면, 또한 여유 있는 사회를 강조하는 문 대통령이라면 조금은 다른 모습을 보일 수 있지 않았을까. 내년엔 자신이 좋아하는 팀 모자를 쓰고 응원하는 문 대통령을 야구장에서 봤으면 좋겠다. 주변 야구팬들과 여유롭게 ‘치맥’을 즐기며 하이파이브를 나눈다면 금상첨화이고.

이헌재 스포츠부 기자 uni@donga.com
#야구#한국 야구#한국시리즈#문재인#대통령 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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