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승헌]대통령 문재인의 ‘변호사’ DNA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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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헌 정치부 차장
이승헌 정치부 차장
변호사 일의 대부분은 서류 작업이다. 변호사들이 법정에서 열변을 토하는 건 영화,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일이다. 중요한 법적 효력은 문서로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잘 알려진 대로 변호사 출신이다.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졸업한 뒤 정계에 입문하기 전까지 부산에서 줄곧 변호사 활동을 했다.

그런 문 대통령의 변호사 DNA를 새삼 절감했던 적이 있다. 6월 미국 워싱턴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첫 정상회담을 마친 뒤 가진 특파원 간담회에서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 “무역적자를 용납할 수 없다. 재협상을 바로 시작한다”고 말한 데 대한 반응을 물었다. 문 대통령은 정색했다.

“왜 (언론에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 합의문만 합의된 것이지 나머지는 합의 외의 이야기다. 각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나와의) 합의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는지…. 아무튼 (한미 FTA 발언은) 합의 외에 별도로 이야기한 것이다.”

당시 최고 이슈였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위한 환경영향평가와 관련해 한미는 성명에 아무 내용을 담지 않았다. 문 대통령은 이에 대해 “합의되거나 양해된 것 외에 미국의 속마음까지 알 수는 없다”고 했다. 그냥 ‘의견만 나눴다’고 해도 될 내용을 굳이 ‘이견이 있어 합의하지 못했다’고 한 것이다.

4개월이 지난 지금, 현실은 문 대통령이 말한 그 ‘합의문’과는 많이 다르다.

한미 공동성명에 빠져 있던 한미 FTA는 이달 초부터 사실상 재협상 절차에 들어갔다. 사드는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이 점증하자 환경영향평가를 마무리하기 전에 조기 배치했다. 반대로 성명에는 담겼는데 현실에선 빠진 것도 있다. 성명에는 “트럼프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 통일 환경을 조성하는 데 있어 대한민국의 주도적 역할을 지지했다”고 되어 있었다. 문 대통령의 ‘한반도 운전석론’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하지만 문 대통령 스스로 “북핵을 해결할 힘이 우리에게 없다”고 토로하는 게 현실이다.

문서와 기록을 중시하는 문 대통령의 ‘리걸 마인드(legal mind)’를 뭐라 할 수는 없다. 없는 것보단 훨씬 낫다. 문제는 내용과 현실이 완전히 달라진 4개월 전 한미 공동성명처럼, 이전 합의문을 들이밀며 ‘법대로 해’ 같은 논리로 대처하기엔 주변 정세가 너무나 급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총선에서 부활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와 1인 체제 구축에 성공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장기 집권의 틀을 구축했다. 대한(對韓) 기조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일본에선 벌써부터 전쟁 가능 국가로의 개헌 이야기가 터져 나오고 있다.

사업가 출신인 트럼프 대통령은 이익이 된다면 기존 합의문이나 거래 명세서 정도는 쓱쓱 고치거나 새로 쓰는 데 익숙한 사람이다. 한미 FTA는 빙산의 일각이다. 러시아까지 참여해 국제사회가 수년간 만든 이란 핵협정을 인증하지 않겠다며 내던진 그다.

다음 달 트럼프의 아시아 순방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트럼프가 북핵 해법을 놓고 중국 일본 정상과 모종의 거래를 시도할 것이라는 관측이 파다하다. 돌이켜 보면 별다른 외교적 구속력도 없는 합의문에만 매달리지 말고, 수면 아래에서 논의되는 진짜 협상에 외교력을 집중해야 할 때다. 트럼프 입에서 ‘한미 동맹은 역대 최상’ 같은 말을 끄집어냈다고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니란 거다.

이승헌 정치부 차장 ddr@donga.com
#변호사#문재인#도널드 트럼프#한미 공동성명#한미 f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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