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배의 神品名詩]미래에서 온 시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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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울주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울산 울주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미래에서 온 시―정일근(1958∼)

저건 거대한 바위가 아냐
저건 바위에 새겨진 그림들이 아냐
하늘과 땅과 바다의 비밀을
사람의 내일을 노래한
저건 미래에서 온 시(詩)
바위그림을 보러온 사람은 읽지 못하는
저 시의 제작연도에 대해
수천 년 전으로만 거슬러 올라가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듣지 못하는
미래의 언어로 쓰인
21세기가 읽지 못하는 저 시를
물소리는 물의 언어로 읽고 가고
바람은 바람의 목소리로 노래하고 가는데
시인조차 시를 알지 못해 고래는 고래
호랑이는 호랑이 사람은 사람
바위 속에 새겨진 시를
자꾸 그림으로만 헤아리다 온다



묻는다, 시는 어디에서 오는가. 하늘에서도 오고 땅에서도 오고 삼라만상이 오래 간직하고 쏟아내는 생각과 말들을 시인은 용케도 알아듣고 받아 적는 것이리라. 눈과 귀가 밝아야 그것들의 몸짓과 웅얼거리는 소리들을 보고 들을 수 있고 사람들이 살아온 발자취나 남긴 기록들, 그리고 솜씨를 다하여 깎고 다듬고 빚어낸 것들에게서도 속속들이 파고들어 시로 캐내어야 한다.

‘울산 울주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국보 285호)는 1971년 원효대사가 수행했다는 반고사지(磻高寺址)를 답사하러 동국대 박물관 조사단이 울주에 갔을 때 마을의 최경환 씨의 안내로 천전리 각석을 발견하였는데 이는 우리네 조상이 바다를 끼고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알게 하는 암각기록화이면서 먼 조상들의 예술혼과 솜씨를 읽게 해준다. 그 DNA가 우리네 몸속에서 자라서 장엄한 역사를 낳고 위대한 문화 창조를 이뤄온 것이리라.

나이를 칠천 살쯤으로 신석기 시대의 것으로 추정하는 이 바위그림은 비록 구석기 때의 알타미라 동굴벽화보다 시대는 뒤지지만 고래, 호랑이, 사슴, 늑대, 멧돼지, 곰, 토끼, 여우, 거북 등 바다와 산의 동물들과 교미하는 놈, 새끼 밴 것, 작살 맞은 고래, 탈을 쓴 무당, 고래잡이 어부 등 200여 점의 삽화가 그에 못지않다. 살아 움직이는 묘사와 조각 기법은 사냥, 무속 등 선사시대 생활상과 함께 가장 오래면서 뛰어난 미술작품이 아닌가. 우리 것만이 아닌 인류의 문화유산인데 사연댐으로 물이 차올라 깎이고 닳아지게 한다면 이 무슨 자손의 도리라 하겠는가.

고래 지킴이로 자처하는 시인 정일근은 바위에 새긴 그림을 보고 또 보다가 마침내 “하늘과 땅과 바다의 비밀을/사람의 내일을 노래한 저건 미래에서 온 시”라고 외친다. 이 시는 먼 과거가 아니라 더 먼 미래에서 온 것이라고.
이근배 시인·신성대 교수
#암각화#미래#신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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