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이정렬의 병원 이야기]환자-의사-정부 참여하는 ‘환·의·정’을 만들자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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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공명영상(MRI) 검사는 과잉 진료 논란의 가운데 있는 항목 중 하나다. 질병 종류나 중증도에 따라 건강보험 적용 여부가 결정된다. 한 대학병원에서 대사증후군 환자가 MRI 검사를 받고 있다.
자기공명영상(MRI) 검사는 과잉 진료 논란의 가운데 있는 항목 중 하나다. 질병 종류나 중증도에 따라 건강보험 적용 여부가 결정된다. 한 대학병원에서 대사증후군 환자가 MRI 검사를 받고 있다.

이정렬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이정렬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현재 상황에서는 건강보험 재정은 물론이고 병원 경영의 지속가능성에 대해서도 위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 병원들은 경영 지속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이 한층 더해졌다. 의료보험제도 도입 시기부터 시작된 저수가 정책으로 의료 행위로만으로는 병원 경영을 유지하기 힘들어진 지 오래됐다. 편법이긴 하지만 수가 보존 기능을 어느 정도 해온 선택진료비, 상급병실료 차액 등 비급여(건강보험 제외 항목)가 사라지면 경영이 더이상 불가능하다는 위기감이 팽배하다.

방법이 적절한지는 모르지만 의사협회가 파업을 선언할 정도로 의료업계가 어려운 여건인 것은 맞다.

환자의 본인 부담도 높아 중증환자가 생기면 가정이 파탄 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여기에 늘어나는 건강수요와 무상진료 등 복지확대 정책으로 건강보험 재정도 추가 재원의 지속적인 확보 없이는 유지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정부는 이들 둘 사이에서 조정능력의 한계를 실감하고 눈치 보기에 급급하고 있다.

열악한 여건 속에서 나름대로 성공을 거둔 한국 의료를 안정적으로 정착시키고 세계화하는 것은 의료계는 물론이고 모든 국민의 공동 책임이다. 부족한 재원을 가지고 폭탄 돌려막기 같은 임기응변으로 해결책을 찾으려 하지 말고 문제의 뿌리를 건드려 국제 경쟁력 있는 한국형 진료를 수립하는 데 어느 정도 비용이 드는가를 원점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실타래의 꼬인 위치를 찾아 우선순위를 정하고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차근차근 풀어간다면 희망은 있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병원 환자 정부 3자가 모두 신뢰할 수 있고 현실을 실제로 반영할 수 있는 데이터 마련을 통한 해결책 강구가 가장 확실한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이미 세계 수준에 오른 한국 의료의 진료 패턴을 교과서 삼아 ‘표준진료지침’을 수립하는 것이 첫 단계라고 생각한다. 표준진료지침이란 환자를 어떻게 발견하여 언제부터 치료를 시작하고 어떻게 유지 관리하며 약은 무엇을 기본으로 쓰는가 하는 문제에서부터 어떤 약은 보험 재정에서 보장하고 어떤 약은 본인이 부담할 것인가 등의 각각 질병에 대한 정보를 국가적으로 모으는 일이다.

다행히 이미 대형 병원을 중심으로 상당히 많은 자료가 병원마다 축적되어 있다. 또 세계 유수 병원과 경쟁할 수 있는 진료 패턴에 대한 상당한 경험과 자료도 축적하고 있다. 다소 아쉽기는 하지만 정부도 정부대로 질병별 요양급여 적정성 평가를 시도하여 진료 적정성 개념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이를 잘 요리하면 표준진료지침을 어렵지 않게 생성해 낼 수 있다고 본다.

다만 질병과 치료 패턴이 너무 많아서 시간이 좀 필요한데 다행히 한국 의료계에는 표준화 과정을 리드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이런 노력을 시작하면 원칙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한국형 표준진료가 창출될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얼마만큼 비용이 소요되는지 수가로 계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의료수가를 표준진료지침의 적정수가를 기준으로 책정한다면 누구에게나 설명이 가능하고 합의도 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자료에 대한 신뢰가 생겨야 수가를 올리더라도 서로 믿을 수 있다.

수가에 대한 신뢰 시스템이 정착된 후에는 의료비가 제대로 쓰일 곳에 쓰이는지에 대한 자정 기능이 반드시 더해져야 한다. 예를 들어 병이 다 나았는데도 퇴원할 생각을 안 하는 이른바 ‘생계형 입원’은 없는지, 단순 감기환자가 종합병원 응급실에 가지는 않는지, 소형 병원으로 가도되는 중대 고비를 넘긴 환자들이 대형 병원에만 몰리지는 않는지, 중복 과잉 검사는 없는지에 대한 모니터링 등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아울러 환자의 치료 성적과 의학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첨단 치료기술의 도입을 위해 필요한 임의비급여 등 논란 대상 판단 기준의 확보와 인정 범위에 대한 원칙 수립도 보다 합리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건강보험공단도 고유 목적에 맞는 사업만 하여 남거나 모자란 일이 없도록 예측 가능한 재정 관리를 해야겠다.

현 시점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이 내는 보험료의 적정한 수준은 어느 정도인지, 의료계에 대한 잘못된 오해는 무엇인지에 대한 공감대 형성이다.

최근 의사협회와 정부 간에 발전협의회가 발족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 할 수 있으나 환자까지 아우르는 환자-병의원계-정부를 포함하는 ‘환·의·정(患·醫·政)’ 상시협의체로 발전시켰으면 한다. 건강 관련 재원을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배분하는 것이야말로 한국형 건강보험 정책의 미래가 아니겠는가.

이정렬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환자#의사#정부#표준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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