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병종]전북의 새로운 도전, 아름다운 순례길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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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종 화가·서울대 교수
김병종 화가·서울대 교수
전북은 드넓은 평야를 지니고 있는 데다 왕조의 ‘탯자리’라는 자긍심까지 지니고 있어 근대까지만 해도 부와 선비정신의 메카로 인식되었다. 쌀농사 철이면 사람들이 몰려와 한 해 먹거리를 장만해 갔고 일제는 연일 쌀을 퍼 날라 가서 군산항을 ‘쌀의 항구’라고까지 부를 정도였다. 먹고 마시는 것이 풍요하다 보니 들풀처럼 문화와 예술이 난만하게 꽃피워 춘향전, 흥부전을 비롯한 판소리며 창극, 도예와 서화 예술들이 번성했다.

일인 미학자인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 같은 이도 ‘전라도 기행’을 통해 이 지역을 조선 문화예술의 메카로 인식할 정도였다. 하지만 산업화에 뒤지면서부터는 양상이 사뭇 다르게 전개되어 갔다. 경제 볼륨이 줄어들면서 도세가 약화된 데다가 개발 붐에서 소외되면서 전북에는 변변한 공장 하나 없다는 자조감이 번지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낙후’라는 단어가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고, 연전 한 방송사의 대담은 ‘전북 낙후의 요인과 극복’을 주제로 했을 정도다.

하지만 관점을 조금만 달리해 보면 전북은 사실 낙후가 아닌 새로운 ‘풍요’의 상징일 수 있는 곳이다. 이제는 이미 경제수치나 정치적 위세만으로 삶의 질을 재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청정한 자연과 문화잠재력이야말로 경쟁력의 주요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영국의 코츠월드나 바이버리 같은 곳은 그 순후한 자연과 아름다운 옛길과 마을들로 세계인이 가 보고 싶은 곳으로 꼽힌다. 전남 순천의 정원박람회며 갈대밭이 그토록 인기를 끌고 있는 것도 사회에 지친 사람들의 위로처가 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광속 열차 사회에서 잠시라도 내려 여유를 찾고 싶은 까닭이다. 마찬가지로 전주 한옥마을은 전통문화 및 다양한 먹거리와 볼거리들로 연일 붐비는데, 이후 전국에 한옥마을 200여 곳이 생겨나게 할 정도로 성황을 이룬다.

작년부터 전북도는 스페인의 저 유명한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올리게 할 만한 ‘아름다운 순례길’ 대회를 열고 있다. 이제 두 번째 행사를 치렀을 뿐인데도 청정한 자연과 함께 종교와 문화예술의 잠재력을 동력으로 한 이 걷기 대회는 전북의 새로운 아이템으로 떠오를 조짐을 보인다. 자연이 순후하고 청정할 뿐 아니라 유난히도 종교 문화 유적지가 많다는 것이 경쟁력의 근원인데 도의 문화 관련 부서에서는 바로 이 점에 착안한 것 같다. 오래된 예배당과 사찰 그리고 아름다운 성당과 유적지를 따라 산길, 들길, 물길을 걷는 행사인데 가다 쉬다를 9일간 반복하며 진행하게 된다.

나는 9월 말에 밤텃골의 한 고찰 송광사에서 출발하여 호숫가의 아름다운 화랑을 지나 천호성당까지 가는 코스의 일부에 동행하였다. 오래된 절집 앞마당의 거수 앞에서 일행과 수인사를 나누고 산속 호젓한 호숫가의 아름다운 오스갤러리 카페에서 삼삼오오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옛 신작로 길로 이어지다가 갤러리 뒷산을 넘자 거기서부터 태고의 숲지대가 나타났다. 이끼 낀 돌들 사이로는 졸졸졸 석간수가 흐르고 있었다. 새들은 지저귀고 초가을의 꽃들은 가슴 뛰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 이 대회를 처음 기획한 전북도 문화체육관광부의 이현웅 국장과 신현숙 사무관 등의 설명을 듣자니 9일간의 순례 동안 기독교 전래길을 포함해 수많은 오래된 교회와 성당, 절과 원불교 법당, 대순진리회 도장, 마애석불 등 종교 유적들만을 돌아보기에도 벅찰 정도라는 것이다. 이 아름다운 순례길은 내가 보기에 그 다양성만으로도 결코 산티아고 순례길에 못 미치지 않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룻길을 동행하고 왔을 뿐이지만 오래도록 몸과 마음이 함께 상쾌했다. 수줍은 듯 돌아앉은 산길, 들길, 물길을 따라 걷는 이 행사가 장차 한옥마을 못지않은 새로운 전북의 상징으로 세계인들을 불러 모을 거라는 예감을 갖게 된다.

전주 영화제와 서예비엔날레, 그 위에 만약 새만금에 유니버설스튜디오 같은 것이 들어선다면 이 지역은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지면서 굴뚝 없는 문화산업지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전북 낙후’는 어디에서도 못 찾을 사어(死語)가 되지 않을까.

김병종 화가·서울대 교수
#전북#낙후#문화예술#자연#전통문화#한옥마을#아름다운 순례길#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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