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영의 따뜻한 동행]“사람이 사라진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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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전기밥솥을 바꿨다. 그랬더니 이 밥솥이 참 말이 많다. 백미, 맛있는 취사를 시작하겠다, 잠금장치를 해라, 뜸을 들이겠다, 밥이 다 되었으니 밥을 저어줘라 등등 낭랑한 목소리로 야무지게 말을 건네는데 귀가 어두운 나의 친정아버지, “저게 다 무슨 소리냐?” 하신다.

그 말씀에 문득 일주일 전에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이 드신 분들은 전화기에서 녹음된 안내가 나오는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이야기였다. 한 분이 자신의 친정 엄마는 전자제품이 고장 나면 서비스센터가 아니라 딸에게 전화를 하신다고 했다. 서비스센터에 전화를 걸면 자동응답의 안내가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알았어. 엄마. 내일 서비스 기사 아저씨 보내드릴 테니 아무 걱정 마세요. 엄만 참 좋겠다. 대학 나온 비서 두어서.”

그렇게 생색을 내고 바쁘게 전화를 끊으려 하자 다급하게 이어지는 엄마의 목소리.

“야야, 근데 옆집 용기네도 세탁기가 안 돌아간단다.”

옆집의 민원까지 해결해 준다며, 덕분에 삼성, 엘지 등 각종 서비스센터 전화번호를 줄줄 외운다고 말했다. 심지어 처음에 자동응답 시스템이 도입되었을 적에 그녀의 큰아버지는 이렇게 불평하시더라고 했다.

“내가 전화를 했더니 어떤 지지배가 내 말은 안 듣고 계속 지 말만 해야.”

지 말만 하더라는 말씀에 한바탕 웃다 보니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30년도 더 전에 미국에 처음 갔을 때 일이다. 당시만 해도 자동안내가 있는지조차 몰랐을 때라서 공중전화에서 들려오는 “헬로”에 나 역시 반갑게 “헬로”로 답하며 장거리 전화를 신청한다는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상대방은 녹음된 소리였다. 게다가 빠르게 제 말만 해버리니 영어가 내 귀에 얼른 들어오지 않아서 느꼈던 당혹감이라니! 그러니 전화기를 붙들고 마치 우리말이 영어를 듣는 것처럼 이해가 되지 않아서 쩔쩔 매는 노인들의 심정이 이해가 된다.

“사람이 사라진다.”

공포영화의 제목 같지만 실제 상황이다. 전화기 너머에서, 은행에서, 유료 주차장에서, 사람 대신 기계가 들어서면서 이제는 기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 바보가 된다. 더구나 기계는 제 말만 하고 질문은 받지 않는다. 이래저래 사람의 훈김이 그리운 세상이다.

윤세영 수필가
#서비스센터#자동안내#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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