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정렬]보라매병원 성공이 주는 교훈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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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렬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교수 전 기조실장
이정렬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교수 전 기조실장
유일한 국립의료기관의 대표가 서울대병원인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정부의 성공적인 국립대 병원 지원 및 육성정책으로 1978년 서울대병원 법인화 이후 35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시간에 국민들은 훌륭한 리더형 국립대병원을 10개나 갖게 됐다. 반면 진주의료원 같은 중소형 공공 의료시설들은 환자가 찾지 않는 병원으로 전락했다. 서울대병원도 이들 병원을 구해 달라는 구조(SOS) 요청을 종종 받아왔다.

비록 완벽하지는 않으나 서울대병원이 위탁 또는 협약 형태로 ‘구조(rescue) 작업’에 성공한 사례가 있으니 서울시 보라매병원과 서울대병원 간의 위탁 경영 스토리다. 1987년 영등포시립병원 시절 위탁협약을 한 이후 26년이 흐르는 동안 보라매병원은 값싸고 질 좋은 국내 굴지의 대표 공공 병원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시와 병원 간의 협약 내용은 재산권, 매수권, 연고권, 권리설정권 등 소유권은 철저히 서울시가 갖고 서울대병원은 오직 병원 구조개혁과 의료의 질 향상에만 전념하는 것이었다. 서울시는 경영혁신 과정 중에 생기는 필요 자원(운영자금지원, 시설 증축 개보수)을 지원했고 자신감이 생기자 인사 독립권과 지속가능 경영에 대한 전략도 수립했다.

2012년 국립중앙의료원(보건복지부 소속)과 서울대병원 간의 협약도 훌륭한 공공 의료시설 ‘구조’ 사례이다. 협약 전까지만 해도 상당한 국고를 쏟아 부었음에도 환자 확보가 어려워 경영난이 심화되자 보건복지부가 결국 손을 뗄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지만 지금은 이런 걱정을 뛰어넘었다.

국립중앙의료원과 서울대병원 간 협약은 보라매병원과의 협약보다 훨씬 가벼운 협약이었다. 권리와 의무 중심의 계약관계라기보다 업무범위 및 기능 분담을 구체적으로 정의했다는 특징이 있다. 즉 △의료인력 교육 훈련, 자문, 견학 및 교류 △환자에 대한 편의 제공 및 의료정보 교환 △병원 경영, 의료의 질 관리 및 정보기술(IT) 인프라 개발에 따른 운영시스템 구축 △국가 중증 외상센터 설립 및 운영 등이었다. 이 밖에 서울대병원은 또 500병상 정도의 중형 지방 전문 병원과도 협약을 해 좋은 성공 사례를 추가했다. 한마디로 국립대 병원이 맞춤형 병원 혁신 도우미 역할을 한 것이다.

이런 사례들은 요즘 문제가 된 진주의료원 같은 공공 의료 전달체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되살리는 단초가 될 수 있다. 현재 10개 국립대 병원이 어려움에 처한 지방의료시설들을 ‘형제 병원’ 삼아 네트워킹해 협업한다면 국가 의료자원을 보다 효율적으로 이용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의료수준을 높이 끌어올리는 데에도 큰 기여를 할 것이다.

나는 이 일을 야구단 창설에 비유하고 싶다. 지역 연고를 중심으로 10개의 공공 야구단(병원단)을 창설한다고 상상해보는 것이다. 이 일은 야구 구단 창설보다 훨씬 쉽다. 관중(환자)은 지금 넘쳐난다. 여기에 선수들(의료진)이 이미 충분하고. 야구장(국립대병원, 지방 의료원, 전문 요양기관 등)도 충분하고 첨단 야구복, 야구장비(수술 및 시술 장비, 로봇수술장비, MRI, CT 등)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제 도움이 필요한 중소 야구단(공공 병원)들은 지역 연고를 고려한 구단(10개 국립대 병원)에 자발적으로 가입해 협약만 하면 된다. 이때 정부가 초기만이라도 조정자 역할이 아닌 지원자 역할을 하면 좋겠다. 이 과정에서 필요한 국립대 병원의 교육 훈련 인적교류 치료를 위한 추가 재정은 명실상부하게 ‘착한 적자’에 해당한다.

협업이 성공하면 혁신이 필요했던 공공 병원 의료의 질은 향상될 것이고 병상 증설이 필요 없으므로 병상 쏠림 현상도 해소될 것이다. 역할과 기능이 나뉘기 때문에 맞춤형 환자 치료가 가능하고 중복 검사 등에 따른 건강보험 재정 낭비도 줄일 수 있다. 마침내 대형구장(국립대 병원)에만 길게 늘어섰던 관중(환자)이 지방 중소경기장(지방의료원)에 몰릴 것이다.

이정렬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교수 전 기조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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