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강승구]‘나는’ 스마트 일수꾼, ‘기는’ 공(公)금융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19일 03시 00분


강승구 재단법인 행복세상 사무총장 협동조합지원센터장
강승구 재단법인 행복세상 사무총장 협동조합지원센터장
서울 강남구 논현동 교보타워 주변 밤거리는 대리운전기사들의 세계다. 오전 2시면 다른 사람 어깨를 부딪치지 않고서는 지날 수 없을 만큼 많은 대리기사들이 모인다. 서울에서 경기도로 나가거나, 경기도에서 서울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이곳을 경유하는 셔틀 승합차를 이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수천 명의 대리운전기사들이 모이다 보니 이들을 상대로 하는 우동, 떡볶이 등 요깃거리를 파는 포장마차와 구두, 운동화, 셔츠 등을 파는 잡화점 등 다양한 가게들이 불야성을 이룬다. 이들 가운데 유난히 눈에 띄는 장사꾼들이 있다. 소위 ‘일수꾼’이라고 불리는 사채업자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을 찾는 대리기사들을 상대로 대출 조건이나 이자에 대해 설명한다. 그리고는 처음 만난 대리기사들에게도 아무런 망설임 없이 스마트폰으로 대출금을 이체해 준다.

이 ‘일수꾼’들은 처음 만난 대리기사들의 무엇을 믿고 선뜻 돈을 빌려줄까. 궁금증은 간단히 해소된다. 스마트폰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리기사들의 스마트폰에 저장된 운전 건수와 수입 등 영업 실적과 혼자 사는지 여부만 확인한 뒤 신용불량이나 파산 여부를 따지지 않고 대출을 해준다.

이들의 영업방식은 대리운전기사들의 미래 수익을 예측해 그 수익에서 원금과 이자를 상환하게 하는 ‘프로젝트 파이낸싱’ 기법이다. 사업의 수익성은 도외시한 채 시공사인 건설회사의 보증만을 믿고 아파트 등 대형부동산개발사업에 ‘프로젝트 파이낸싱’으로 돈을 빌려주었다가 큰 돈을 떼이는 일반금융기관들은 이들과 비교하면 하수다.

신용불량에 빠져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며, 은행 등 정상적인 금융기관의 문턱을 넘기 어려운 대리기사들에게 이 ‘일수꾼’들은 구세주나 다름없다. 몸뚱이 하나가 밑천인 대리운전조차 스마트폰 구입비, 몇 개 프로그램 회사에 내는 프로그램 이용료, 콜센터에 내는 운전자보험료, 그리고 대리운전비를 받을 경우 자동적으로 빠져나가는 콜센터 수수료 계좌용 기본예치금 등 족히 50만 원의 ‘창업자금’이 필요하다. 이렇게 시작해도 손님이 없거나 지역을 옮겨 급전이 필요한 경우가 생기면 ‘스마트 일수꾼’들의 신세를 진다.

‘일수꾼’들 입장에서야 업무상 ‘금주(禁酒)’에 ‘성실’이 기본인 대리기사들이야말로 거의 돈 떼일 걱정이 없는 ‘봉’이다. 정상적인 직장 생활을 하는 직장인이나 공무원이라면 금융기관의 신용평가 시스템에 따라 등급이 정해지고, 신용대출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신용불량 상태에 빠진 많은 대리운전기사들에게 일반금융기관들의 문턱은 너무나 높다.

대리기사들은 금융기관의 높은 문턱에 좌절하여 일수를 쓰고, 술 취한 손님들의 횡포를 묵묵히 참으며 오늘도 밤을 달리고 있다.

작년부터 재단에서 협동조합지원센터장을 맡아 협동조합 지원에 나섰고, 개인적으로도 서울시 제1호 협동조합으로 신고된 한국대리운전협동조합 등 몇 개 협동조합의 무보수 감사를 맡고 있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대리운전을 이용할 때 남의 일 같지가 않다. 열악한 상황에서의 심야장시간 노동으로 몸이 축나기도 하지만 대리운전은 대리운전기사들이 좌절과 경제적 고통을 이겨내고 새로운 삶을 찾게 하는 기회의 사다리가 될 수도 있다. 높은 곳에서 말로만 서민이나 사회적 약자를 위한 금융을 소리치지 말고 낮은 곳으로 다가가 필요한 곳에 필요한 지원이 이뤄지는 스마트한 사회적 금융이 좀더 필요한 때이다.

강승구 재단법인 행복세상 사무총장 협동조합지원센터장
#공금융#일수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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