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75>봄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3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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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
―최승호(1954∼)

창호지로 엷은 꽃향기 스며들고
그리움의 푸른 늑대가 산봉우리를 넘어간다.
늘 보던 그 달이 지겨운데
오늘은 동산에 분홍색 달이 떴으면.
바다 두루미가 달을 물고 날아 왔으면.
할 일 없는 봄밤에
마음은 멀리 멀리 천리(千里) 밖 허공을 날고
의지할 데가 없어 다시 마을을 기웃거린다.
어느 집 핼쓱한 병자가
육신이 나른한 꽃향기에 취해
아픔도 없이 조용히 죽어가나 보다.
아름다운 용모의 귀신들이
우두커니 꽃나무 그늘에 서서
저승에도 못 가는 찬기운의 한숨을 쉬고
인간축에도 못 끼는 서러운 낯짝으로
누가 좀 따뜻이 나를 대해줬으면 하고
은근히 기다리는 봄밤
때에 절은 묵은 솜뭉치처럼
짓눌린 혼(魂)들을 꾸겨 담은 채
저승열차는 내 두개골 속을 지난다.

삶과 죽음이 섞여 있는 어둠의 세계가 환상적으로 아름답게 이미지화돼 있어, 아찔하게 탐미적이다. 죽음과 혼(魂)과 귀신의 냄새가 시인의 외로움과 짝을 이루면서 물씬 꽃향기로 어지러이 휘돈다. 아편에라도 취한 듯 만드는, 이 쓸쓸하고 몽환적인 봄밤의 파토스! 세상에, 이토록 섬세하고 적나라한 귀기(鬼氣)라니! 시리고 아름다운 봄밤, 귀신들도 용모가 아름답다. 환상의 세계에는 추함이 있을 수 없다. 현실을 떠났기 때문에 귀신도 아름답다! 허나, 환상이 하늘 끝까지 올라가면, ‘때에 절은 묵은 솜뭉치처럼/짓눌린 혼(魂)들을 꾸겨 담은 채’ 슬픈 환멸이 땅바닥 저 밑까지 곤두박질한다. 봄밤의 꽃향기여, 다시 짙어라. 시인이 거듭 취해 ‘그리움의 푸른 늑대가 산봉우리를 넘어’가게 하라.

가령 라일락 꽃향기가 바람결에 실려 오면, 함께 밀려드는 아득한 그리움에 문득 코끝 치켜들고 발걸음 멈추게 되는 봄날. 그러하게 달콤하고 부드러운 봄밤과 완연히 다른 최승호의 독한 ‘봄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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