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이후 한국 남자들은 도무지 놀 줄을 모른다. 영∼ 재미가 없다. 어쩌다 여유가 나면 뭐하나. 쯧! 쯧! 안절부절 어찌할 줄 모른다. 우선 마땅한 취미가 없다. 사람을 만나도 할 말이 별로 없다. 서로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슬그머니 TV 화면에 눈길이 옮아간다. 풋! 하기야 언제 놀아봤어야 놀지.
장년의 한국 남자들은 울 줄도 모른다. 펑! 펑! 눈물을 쏟으면 큰일 나는 줄 안다. 돌부처가 따로 없다. 20대 아들의 이번 ‘대선(大選) 눈총’에도 묵묵부답 말이 없다. 뚱하고 무뚝뚝하다. 그런데도 왜 곧잘 꽁할까. 툭하면 삐친다. 아마도 답답하다는 신호일 것이다. 그나마 마음속엔 조갯살처럼 여린 부분이 남아있음이 분명하다.
눈물도 배워야 나오는가. 누가 가르쳐줘야 울 수 있는 것인가. 가슴이 꽉 막힐 땐 엉엉 우는 게 최고다. 있는 소리, 없는 소리 모두 내지르며, 한바탕 대성통곡을 하고 나면 속이 후련해진다. 비온 뒤 말간 하늘처럼 가슴속이 개운해진다. 온갖 울혈과 앙금이 씻은 듯이 사라진다.
그렇다. 그것은 배 속이 더부룩하고 답답할 때 나오는, 한 줄기 시원한 방귀 소리나 같다. ‘내 몸 안에서 하늘과 땅이/드디어 서로 통하는 소리/꽉 막힌 구멍이 시원하게 뚫리는 소리/생명의 폭죽이 터지는 소리, 소리’(최서림 ‘방귀’)
갓난아이들은 이마에 실핏줄이 퍼렇게 돋을 때까지 울어댄다. 하지만 눈물이 없다. 몸짓과 소리로만 운다. 그것은 울음이 아니다. 저절로 터지는 ‘생명의 소리’일 뿐이다. 짐승들은 아예 태어날 때 울지조차 않는다.
대한민국 수컷 꼰대들의 눈물은 고단한 ‘인생의 사리’이다. 수십 년 곰삭아 나오는 진액이다. 피와 땀이 버무려진 ‘저릿하고 먹먹한 삶의 지문’이다. 굳이 감출 게 뭔가. ‘남몰래 흘리는 남자의 눈물은 보석’이라고? 푸하하! 젠장 찌개! 눈물은 피와 농도가 같다. 그래서 눈물은 짜다.
조선 선비 연암 박지원(1737∼1805)은 늘 울고 싶었다. 하지만 간장 종지만 한 조선 땅 어디에도 울 만한 곳은 없었다. 그러다가 1780년 광활한 중국 요동 벌판에 들어서면서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아, 천하의 훌륭한 울음터로다! 사나이가 한번 크게 통곡할 만한 곳이로구나!” 연암은 그곳에서 한순간 ‘총 맞은 것처럼’ 가슴이 뻥 뚫려버렸다.
강호에 절망과 분노가 가득하다. 핏발 선 눈빛들이 서늘하다. 밥벌이가 이렇게 힘든 적은 일찍이 없었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뭔가를 해야 한다. 몸의 에너지는 바닥나 ‘번 아웃(Burn Out)’된 지 오래. 대한민국 ‘5학년 남자’들은 어디 가서 실컷 울고 싶다. 하지만 그럴 만한 곳은 아무 데도 없다. 적막강산. 술만 퍼마신다. 술이 눈물이다.
문득 눈물을 삼킨다. 왈칵 눈물을 머금는다. 눈물이 눈에 어린다. 물기에 젖는다. 핑 눈물이 돈다. 눈물을 글썽인다. 질금질금 눈물을 자아낸다. 눈물을 짠다. 그렁그렁 눈물이 매달린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콸콸 눈물이 터진다. 목 놓아 꺼이꺼이 운다. 퍼질러 앉아 펑펑 울어버린다. 눈물이 골짝 난다. 눈물이 바다를 이룬다.
그래 실컷 울어라! 밤새도록 울어라! 땅을 치며, 발을 구르며, 울고 또 울어라! 늑대처럼 울부짖어라. 놀 줄 모르면 어떤가. 눈물은 힘이 세다. ‘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이대흠). 창자가 쏟아질 때까지 울고 또 울어라! 대한민국 수컷 꼰대들아! 울어야 산다.
‘눈물 속으로 들어가 봐/거기 방이 있어//작고 작은 방//그 방에서 사는 일은/조금 춥고/조금 쓸쓸하고/그리고 많이 아파//하지만 그곳에서/오래 살다보면/방바닥에/벽에/천장에/숨겨져 있는/나지막한 속삭임 소리가 들려//아프니? 많이 아프니?/나도 아파 하지만…’(김정란 ‘눈물의 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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